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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8화) 전국 일주와 뒤늦게 밝혀진 왕따사건.

by 피닉스

대안학교의 꿈마저 산산조각 난 이후부터 시후는 말수도 줄고 상담도 가는 둥 마는 둥 하며 폐인이 되어 갔다. 거의 하루 종일 방에서 틀어박혀 밥때가 돼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일하러 가면 그때서야 나와서 음식을 챙겨 먹고 들어가듯 했다. 싱크대에 그릇이 쌓이고 있는 걸로 봐서 굶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감안해 지적하고 조언하면 역효과라 여겨져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학교나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기에 학교는 안 가도 되니 시후의 정신병만 나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 게 없었을 것 같았다.


어찌어찌 설득을 해서 약을 처방받아 먹이면 딱 3개월이 고비였다. 그 시점에 부작용이 나타나 계속 먹일 수도 없었다. 쌀찌고 필로폰쟁이가 되는 건 기본이고 심한 변비가 와서 내과에서 변비약을 처방받아 먹이면 또 이번에는 소변이 안 나와 비뇨기과에 가서 약을 처방해 먹여야 하는 식이었다. 터진 논둑을 막으면 반대편에 또 터지고 그곳을 막으면 또 다른 곳에 터졌다. 정신을 고치려 들면 육신의 다른 부위가 고장이 나는 식이었다. 또 약을 약하게 지어 효과가 없다고 하면 한 단계 높여서 처방해 주면 이번엔 편의점을 가거나 산책 등을 위해 길을 걷다가 아무 곳에나 쓰러지는 것이다. 만약에 옆에 사람이 없고 찻길이나 경사진 곳 위험물이 있는 곳에서 쓰러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대부분의 의사들은 약과는 상관없다고 잡아떼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10%의 의사만 부작용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의사들 중 열에 아홉은 자신이 처방한 약이 부작용이 있다고 하면 본능적으로 부정부터 하고 보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도 환자 상태를 잘못캐치해 그에 적합한 약을 처방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듯했다. 한마디로 의사로서의 자질에 흠집이 생기는 것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은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심리적인 불안을 차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전자는 본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고 후자는 환자를 위해서이다. 본질적으로는 둘 다 약에 대한 부작용은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 정신과적인 부작용은 개인차가 분명히 있었다. 의사들은 자꾸 학계나 논문을 들먹이며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다는 말로 설득하고 일축해 버리는데 능통했다. 정신질환자는 다른 질병과는 달리 오감이 예민하게 발달돼 있다.

일반환자와는 달리 정신과를 출입하는 환자와 그 가족은 의사의 숨소리나 눈빛만으로도 건성인지 진심인지 다 느끼고 있다. 밀린 환자를 빨리 끝내기 위해 그동안의 변화와 부작용에 대해 상세히 전달하고픈 절박한 환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위해주는 척 미소를 가장해 외면해 버리는 미세한 반응까지 다 읽고 있다.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사랑을 가득 품은 채 환자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어루만져주는 인간적인 의사는 정녕 존재하지 않는 걸까?


시후와 같은 해에 졸업한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하반기를 치닫는 시점이었다. 세월은 시름에 찬 우리 가족들을 팽개친 채 저 혼자서 무심하고도 줄기차게 달아났다. 시후를 위한답시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남편도 이미 그 무렵부터 자주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가 잦았고 악몽에 시달렸다. 우리 부부의 병세가 깊어지기 전 시후를 정상으로 돌려놔야 된다는 생각 오직 그 생각만이 뇌리에 맴돌 뿐이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가게에 '무기한 휴재'의 쪽지를 붙이고 우리 가족들은 벼르고 별러왔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일주에 나섰다. 3년 전에 거금을 들여 마련한 캠핑카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휴가철에 세 번만 이용했던 게 고작이었다. 특별한 장소를 가고자 하는 목적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좋은 경치를 찾아 드라이브를 하면서 자연에 몸을 맡기고 느낌이 꽂히는 장소에 정착했다. 편안한 곳은 3일쯤 머물고 그렇지 않은 곳은 반나절 또는 1박으로 마무리하고 달리고 또 달렸다. 목적 없이 하는 여행도 나름 설레고 좋았다. 그냥 길 따라 달렸다. 시내를 벗어나 국도가 보이면 국도로 고속도로가 보이면 그 길을 합류해 무작정 달렸다. 문득 이대로 지구 끝까지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운전대는 두 시간 간격으로 남편과 내가 교대로 잡았다.


시후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캠핑카가 이성이 있어 우리를 이끌듯 본능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금방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맹렬히 덮쳐오는 산더미만 한 파도 앞에 서 있었다. 용트림하듯 꿈틀대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면 근심걱정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당장 죽을듯한 고통도 그 순간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회귀본능으로 이끌었다.


가게를 한답시고 몇 년간 가족여행 한번 못했는데 그날의 여행은 신의 한 수였다. 5년간이나 가슴속 깊숙이 박힌 원한과 괴로움의 무게에 짓눌러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지내왔을 시후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시후가 3년간이나 당해왔던 아이들의 따돌림과 4학년 때 담임이 무차별로 공격해 왔던 수치심과 모욕을 터뜨린 날이었다. 매스컴에서 왕따와 학교폭력으로 자살하거나 군대에서 선임들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끔찍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저 지경이 되도록 부모가 까맣게 모를 수가 있냐고 격분하던 여자가 등신 같은 나란 여자였고, 저런 놈들 모조리 처넣어 다시는 사회의 빛을 못 보게 차단시켜야 한다고 목청 높여 열을 올리던 여자도 이 쳐 죽일 나란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제 자식이 말라가고 죽어가는데도 태평스럽게 밥을 먹고 일하느라 뛰어다니고 웃음을 흘리며 살았던 것이다. 4학년 때 담임교사의 집요한 모욕을 마음 여린 시후가 혼자서 다 감내해 온 것이다. 거기다 아이들까지 가세해 신발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급식소에서 식판으로 머리를 치고 조롱하며 달아나고, 급식 먹을 때 수저를 빼앗아 설거지통에 던져버리고 심지어 몇몇이 달려들어 바지까지 벗기고 서로 낄낄거리며 성적인 희롱까지 했다는 것이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당시 나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시후를 씻길 때 몸을 매의 눈으로 살펴도 구타의 흔적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폭력은 아닐 거라 지레 짐작했었다. 다행히 신체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지만 단순한 아이들의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수위가 한참 넘었다. 심적으로 여리고 나약했던 시후는 그 모든 걸 감당하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4학년 때 시후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파서 하루 결석하겠다고 담임한테 전화를 했을 때 평소에 얼마나 시후를 갈구고 모욕을 줬으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시후 엄마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 와..? 와.? 와.?" 하며 ('왜'의 경상도 사투리) 방어태세로 돌입했다는 걸 이 멍청한 여자는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시후에게 가했던 자신의 만행을 시후가 엄마한테 고자질했다고 지레 짐작한 행위였음을 반증한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열나고 아팠던 것도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육체적인 질병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매정하고 경우 없는 여자인 줄 첫 만남에서 눈치챘으면서도 시후가 이렇게 정신병이 들만큼 시달렸다는 의심은 왜 못해 봤을까? "그걸 왜 이제 와서 얘기하니? 그 당시 했었다면 엄마가 학교를 찾아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뵙고 조치를 취하던지 그게 안 먹히면 학교를 한바탕 엎어버리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서라도 그 선생과 아이들에게 징계를 가하고 사과라도 받아 냈을 것 아니니? 이 멍청한 놈아. 그때 말했으면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혼자 참고 삭이다 이런 끔찍한 병은 걸리지 않았을 거잖아." 시후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했다. 엄마 아빠가 가슴 아파할까 봐 말 못 했어요. 나만 참으면 되는데 엄마 아빠가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게 더 무서웠어요. 전학 간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구역질이 났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끝까지 추궁했어야 했다. 전학 간 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무단결석을 하고 산에서 배회했던 날 사람이 무섭다고 했을 때도 나 좀 살려달라는 외침이었는데.. 그렇게 알아챌 기회가 차고 넘쳤는데.. 이 미련한 년이 원통하게도 다 놓쳐버렸다. 교우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건 어느 정도 알았고 그게 시후의 소극적인 성격문제라고만 치부했었다. 시후가 3년을 두려움과 괴로움에 떨면서도 부모한테도 숨기며 지옥 속에서 허우적댈 때 부모란 작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부부싸움을 하고 손님들과 시시덕거렸던 것이다. 나란 여자가 용서가 안 됐다.


이 더러운 창자를 다 끄집어내 저 바다에 광채가 나도록 씻어서 다시 장착하고 싶었다. 이 더러운 피도 다 빼내서 수정처럼 맑게 걸러서 다시 주입시키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신이 있어 과거를 잊을 수 있는 알약을 내려주신다면 주저 없이 받아 삼키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날밤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듯 고통에 한없이 몸부림치던 파도 앞에서 같이 울부짖었다. 우리 셋이서 껴안고 이 세상에 태어나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눈물 따윈 흘리지 말고 당당히 걸어가자고 맹세한 날이었다.


시후가 어렸을 때 눈빛이 흐릿했던 것도 유전적인 요인으로 뇌신경에 문제가 있어 세레토닌이 기준치 이하로 분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울지수가 높게 나오고 자연히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취약한 정신과 몸의 상태에서 아이들이 상처 주는 언행에 대항도 못하고 고스란히 혼자서 삭이면서 마음이 병들어간 게 원인이라고 나름대로 유추해 보았다. 건강한 아이한테는 별것 아닌 상대의 놀림이 크게 다가와 공포 수준으로 느꼈을 것이다. 상대편 아이는 또 별것 아닌 것에 공포로 반응하는 시후에 대해 묘한 희열을 느끼고 점점 수위를 높여갔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장장 2주간을 전국을 일주했고 마지막 날 2박 3일간은 남해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모닥불도 피우고 낚시로 문어와 갈치, 민어도 잡아 즉석에서 회와 매운탕을 먹는 맛이란 이 세상 그 어떤 맛과도 비교불가였다. "시후야 이미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용서하자. 그때는 그 아이들도 어려서 철이 없었던 거야. 지금쯤은 그들은 너를 왕따 시켰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할 거야. 복수의 칼을 갈면 네 몸과 마음만 상하니 다 내려놓자. 그리고 시후는 어른이 되어도 4학년 때 담임선생님처럼 나약한 아이를 상대로 면박과 모욕을 일삼고 상대의 괴로움을 외면하는 교사로서의 자격미달인 파렴치한 어른은 되지 말자. 항상 상대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배려할 줄 아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복수하는 거야." "근데 그게 잘 안 돼요. 노력해 볼게요. 시후야 성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 뭐든 급하게 하면 체하니까. 시후는 할 수 있어. 엄마 아빠 아들이잖아."


지역의 한 방송국에서 특집 다큐로 심리적인 혹은 다양한 상황으로 인해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에게 전문가를 투입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교정하고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마지막 편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이라 놀라웠다. 약도 상담도 무용지물인 시후에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고민은 당사자와 직계가족은 얼굴모자이크 처리를 안 하는 조건이었다. 한마디로 세상에 얼굴을 공개해야만 출연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시후야 우리 저 프로그램에 출연해 볼까? 아무래도 얼굴공개 때문에 안 되겠지?" " 제 병이 나을 수 있다면 한번 출연해 보고 싶어요. 생각해 볼게요." 그냥 별 기대 없이 던져본 말에 의외로 덥석 무는 시후로 인해 TV출연이야말로 우리 가족에게 내리는 마지막 동화줄이자 구세주 인양 설레기 시작했다.


(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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