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가 없으니 설이라고 특별할 것도 없다. 게다가 폭설에 강추위까지 몰려와 길이 얼어붙을 거라고 방송에서는 연일 겁을 주니, 아들을 불러 떡과 만두 사골곰탕과 나박김치를 미리 들려 보내면서 길이 사나우면 오지 말고 집에서 떡국 끓여 먹고 있으라고 했다. 요란스럽던 일기예보는 빗나갔고 적당히 쌀쌀한 겨울날씨에 길은 보송보송했다.
두 집 다 며칠 전부터 떡국을 끓였으니 설날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기로 하고 맛있다는 리뷰가 줄줄이 달린 가게를 골라 마주 앉고 보니 삼대 겨우 여섯 명이다.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주 손에 세뱃돈을 쥐여주고 녹두부침개와 식혜를 들려 아이들을 보낸 다음,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해가 기울도록 낮잠을 잤다. 저녁으론 매콤 칼칼한 김치찌개와 녹두부침개에 밥알 동동 띄운 시원한 식혜 한 사발로 마무리했다. 몸은 한없이 편한데 마음 한구석은 영 불편했다.
한때는 섣달 한 달 내내 광이 가득 차도록 음식을 준비해 설날 아침 일가친척 이삼십 명씩 모여 차례를 지낸 다음 교자상 세 개를 펼쳐 떡국을 먹었고, 정월 보름까지 손님을 치러내느라 지쳐 쓰러질 지경인 때도 있었다. 어느 집이나 그랬고 준비한 명절 음식의 양은 그 집 안주인의 자존심이었다.
초아흐레 증조할머니 기제사를 지내고, 열나흗 날 점심때부터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장만해 배불리 먹고 남자들은 밥값으로 아홉 짐의 나무를 해와야 한다는데, 이미 나무 할 일 없는 세상이 됐으니 이웃끼리 모여 먹고 놀면서 하루를 보낸다.
드디어 설이 끝나는 보름날, 캄캄한 새벽에 잠에 취한 아이들을 일으켜 일 년 동안 귓병 없이 좋은 말만 들으라고 귀밝이 술로 식혜 한 모금씩을 먹이고 부스럼 방지용 부럼을 와그작 깨물어 부수고, 아침으로 하얀 쌀밥을 하는데 밥 뜸 들일 때 토막 내 물에 담가두었던 가래떡을 얹어 쪄 밥풀이 더덕더덕 붙은 가래떡을 하나씩 먹었다. 보름달 같은 만두를 넣어 떡국을 끓여 이른 저녁으로 먹고 바깥으로 나가, 아이들은 자기 나이만큼 매듭을 묶은 짚으로 만든 횃대에 불을 붙여 떠오르는 쟁반만 한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빌고 나서 집으로 들어가고, 시어머니는 아침에 각자의 밥그릇에서 한 숟갈씩 덜어내 창호지에 곱게 싸 이름을 써두었던 밥을 들고나가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개울물에 띄우셨다. 여름 내내 아이들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바치는 뇌물이다.
손주를 향한 시어머니의 애달픈 마음 덕분에 아이들은 무사히 자랐고, 그 아들이 처와 아들을 데리고 와 설날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