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성순 Aug 01. 2024

료칸의 미스터리

                            

겐센공원에서 공연을 보고 료칸에 돌아왔다. 씻고 막 자려고 불을 껐는데 갑자기 TV가 켜지며 큰 소리가 나는 통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리모컨을 찾았다. 구석진 곳에 있던 리모컨을 발견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저절로 켜진 TV 때문에 의아해하다가 잠이 들었다. 밤 12시였다.  

   

창밖이 훤한 걸 보니 아침인가? 커튼을 젖히니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성산 일출봉의 10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분화구가 내려다보인다. 분화구는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여있고 햇살이 가득하다.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안고 출렁이는 연초록의 이파리들, 료칸은 그 풍경을 내려다보는 분화구의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 어젯밤에 늦게 료칸에 와서 바깥 풍경을 못 봤는데 이렇게 멋진 외경을 가진 곳이었구나. 숙소를 참 잘 잡았어. 내가 묵어 본 숙소 중 최고야’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넓은 분화구에는 청량한 아침 햇살과 바람이 가득하다.

으스스 추운 기운에 잠이 깼다. 방안이 너무 더워 난방을 끄고 잤더니 찬 기운이 가득하다. 일어나 앉아 ‘꿈이었나?’ 생각한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라 혹시 내가 어떤 여행지에서 본 장면이 아닌가 골똘히 생각해 본다.

     

창문을 열면 눈 쌓인 뒷산이 보일 뿐이다 

다음 날은 민속촌과 지옥 계곡을 다녀오느라 료칸에 들어왔을 때는 지쳐 있었다. 료칸 안은 지나치게 따듯했고 데스크 직원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료칸은 텅 빈 듯 조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가니 복도에서는 여전히 몽롱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저녁 식사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 찬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야식으로는 컵라면과 사케도 먹었다. 온종일 너무 많이 돌아다녔는지 피로가 밀려와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시끌하게 나며 한쪽 벽이 환해진다. 놀라 일어나니 TV가 또 켜져 있다. 더듬거리며 리모컨을 찾아 TV를 껐다. 시간을 보니 12시다. 전기 코드를 찾아서 뽑아둬야 하나 생각하다가 피곤해서 그냥 도로 누웠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딸은 ‘밤 12시에 TV를 켜는 료칸 귀신’과 대적하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밤을 새웠다. 혹은 어제 저녁 료칸에 왔던 ‘오니’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방안이나 료칸의 분위기를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싶다. 지나치게 깍듯이 지켜지는 일본식 예법, 복도에 흐르는 몽롱한 음악, 방에 있는 벽감과 야릇한 설치물들, 모든 방이 예약 마감이었는데도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투숙객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하며 데스크 직원에게 TV 켜진 얘기를 했더니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지난번 투숙객이 TV 예약을 해놓은 것 같다’라며 메모지에 207이라고 적는다. 우리는 306호라고 하니 당황한 얼굴로 더 환하게 웃으며 고쳐 적는다. 여행을 와서 밤 12시에 TV 예약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207호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긴 적 있었나? 하는 의문을 품은 채 료칸을 떠났다. 

왼쪽 도로는 조금 넓고, 가운데 눈쌓인 도로는 지옥계곡으로 가는 길. 료칸은 두 길이 나뉘어지는 지점에 있다.


이전 21화 비슷한 듯 다른 민속놀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