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여행 가고 싶어요..”
“여행? 어디 가고 싶어?”
“그냥 우리 예전에 봄 되면 나들이 가거나 캠핑도 가고 그랬잖아요. 마지막.. 아니 꽃 구경하러 가고 싶어요.”
새봄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엄마는 놀랐지만 모처럼 하는 부탁에 반가워했다.
“그럴까? 우리 며칠만 여행 갔다 올까? 엄마가 선생님께 한번 물어볼게.”
부모님은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일주일 간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어디가 좋을까 며칠 고민하시더니 공기가 맑고 자연을 품은 시골로 데리고 가 주었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난 여행길, 새봄이는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을 살며시 내려보는데..
창문을 타고 들어온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은 잠시나마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느낌을 주었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한참을 가더니 차가 다다른 곳에 멈추었고 부모님과 새봄이는 차에서 내려 며칠간 머물 펜션과 주변 풍경을 보고는 조심히 대문을 열어본다.
오래된 느낌이지만 하얀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2층으로 된 집과 그 집을 품고 있는 하얀 담장이 둘러 쌓여 있었다.
대문을 들어와 마당 오른쪽을 보니 하얀 담벼락과 조화를 이룬 장독대가 여러 개 있었고 그 옆 모퉁이에는 하얀 눈송이를 가득 머금고 있는 듯한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며 그 밑으로 나무 그네가 있었다.
삭막한 도시 속과는 달리 자연이 가득한 동화 같은 곳이었다.
막상 여행을 왔지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이틀 동안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간간히 올라오시는 부모님 발소리가 들리면 늘 자는 척하다 아무도 없을 때 일어나 앉아 창문 밖을 바라만 보았다.
유난히도 밝은 달빛이 고요한 밤을 더 쓸쓸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있으면 병원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새봄이는 남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나가 보기로 다짐하고는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크게 숨 호흡 한번 하더니 굳게 결심을 하고 핸드폰도 잠시 탁자 위에 두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보는데..
아빠는 안 계셨고 엄마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통화 중이셨다.
엄마의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 혼자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마당에 나오니 아빠가 주변을 사진기로 이리저리 찍어 보시더니 뭐가 잘 안 되는지 쩔쩔매고 있던 중 밖으로 나온 새봄이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 딸 나왔어?”
“네, 아빠 뭐해요?”
“잠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지. 여기서 바비큐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우리 저녁에 밖에서 바비큐 해 먹을까?”
“좋아요. 근데 그 사진기는 뭐예요?”
“아 아빠가 사진을 좀 찍어보려고 챙겨 왔는데 하도 오래됐는지 이게 좀 어렵네”
“한번 줘 보세요. 아, 이게 뭐야. 다 흔들렸잖아요.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새봄이는 아빠의 사진기를 보더니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우리 딸 고마워.”
“예쁘게 많이 찍어요."
“그래.”
아빠는 신기한 듯 다시 이곳저곳을 찍어 대더니 아까와는 달리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아빠가 귀여웠는지 새봄이는 싱긋 웃더니 벚나무와 그네가 있는 곳으로 사뿐히 걸어가 보았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부모님은 요양하러 온 게 아닌 예전처럼 여행 왔듯이 나를 대해 주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보니 새봄이는 지난날 자신이 아픈 후 부모님의 모습을 회상했다.
방에서 자다가 깬 새봄이는 물을 마시러 나가려다 처음으로 부모님이 소리 없이 울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늘 웃는 얼굴로 응원해 주시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셨기에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시는 줄 몰랐다.
다음 날이 되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정하게 대해 주셨기 때문에 새봄이는 부모님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한 번은 병원 휴게실에서 몰래 울고 있는 엄마와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위로해주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달래주고 싶어 다가가려 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묵묵히 바라보고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부모님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테고 이미 아픈 걸로 짐이 되었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힘드시지 않게 자신이 떠나기 전 좋은 모습만 보여준다면 세상에 남겨질 부모님이 조금이나마 덜 힘드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신의 아픔과 힘든 마음을 잠시 숨겨두고 가면 쓰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그 뒤에도 종종 자리를 비우시곤 했지만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회상을 마친 새봄이는 그네로 가서 자리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고는 살며시 앉아 보았다.
생각보다 발이 약간 좀 뜨긴 했지만 그래도 불편함은 없었다.
발끝을 세운 후 힘껏 발로 차 흔들어 보았고 삐그덕 거리며 들리는 소리가 제법 낭만적이었다.
따뜻한 바람의 온기와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다 눈을 감아 보는데..
흔들리는 그네가 잠시나마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바람이 불어오자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새가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한껏 봄내음이 가득한 바람을 느끼는 중 담벼락 쪽에서 누군가 새봄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안녕?”
깜짝 놀라 그네를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담벼락 위로 하얀 피부에 예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과 이마를 가릴 정도의 검은 머리를 한 남자애가 팔을 기대어 새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바람이 불어오더니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살랑거리는 꽃비가 내렸고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지 상태가 되었다.
스르르르 꽃잎 하나가 새봄이 무릎에 사뿐히 내려앉자 온몸에 파동이 일어나며 최면에서 깨어난 듯 새봄이는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