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청산수목원
고투어는 웬만한 거리의 여행은 대체로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하루 자자고 짐을 바리바리 싸는 것도 귀찮고, 어디서든 편안하게 잠드는 성격도 아니고. 그리고 숙박 시설에 돈 쓰는 게 그렇게 아깝더라. 그래선가.. 어디서든 돈 주고 묵게 되면 그 추억이 진하게 남는 편이다.
이 날 태안 여행도 그랬다. 바닷가에 있는 그 숙박시설은 정말로 오래된 펜션이었다. 체크인을 하면 다음 날 아침 조식으로 먹을 대만식 연유 샌드위치와 주스를 주셨다. 복층으로 된 방마다 파란색 도장을 칠한 수영장이 딸려 있어 펜션 정원 쪽으로 나오면 방에서 물놀이 중인 가족들도 보였다.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고투어는 좋아하지만 대개 나 때문에 물놀이를 못 한다) 수영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펜션의 사유지라는 넓은 바닷가 정원을 돌아다녔다. 소나무가 멋들어진 정원에는 여름 내 사용했을 듯한 어린이용 물놀이터가 있었고, 그네와 해먹도 있었다. 예약해 둔 바비큐 디너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우리는 해먹에 눕거나 그네를 타며 서해의 낙조를 감상했다. 낙조 하면 역시 서해다. 바닷물이 빠지고 드러난 갯벌 위로 지는 해가 드리운다. 해는 남겨진 물을 최대한 반짝이게 한 후에 사라졌다. 노을이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멋진 낙조였다.
펜션에서 준비해 준 고기와 채소, 그리고 오랜만의 반주와 함께 조용히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가 챙겨 와서 먹는 것보다 편하고 저렴하다. 준비하고 치우는 시간을 절약해 휴식과 대화에 더 집중해 본다. 먹었으니 다시 산책. 이번엔 펜션 바깥으로 나가본다. 주변은 모두 펜션이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근래 많이 생긴 반려동물 동반 펜션들도 꽤 보인다. 동네 한 바퀴 구경하고 나니 잘 시간이다.
역시나 남의 집에서 자는 건 편치 않았다. 복층이라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었고, 공기가 정체되어 있어선지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어쨌든 각자의 편안함을 찾아 휴식을 취하며 아침이 밝았다. 체크인할 때 받은 샌드위치와 주스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오늘의 여행지, 청산 수목원으로 갔다.
입구가 아름다웠다. 나보다 키가 크고 푸른 나무를 보면 왠지 다른 나라에 온 기분이 든다. 그리고 왠지 이 나무들 뒤에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매표를 하고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자 연못이 보인다. 한여름에는 연꽃이 잔뜩 피었었겠지. 여긴 조금 논밭뷰인데 싶었을 때, 눈을 돌리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가을에 피는 꽃들이 피어있다. 중앙에 쉴 수 있는 넓은 카페가 있고, 카페를 중심으로 테마가 있는 정원이 꾸며져 있다. 그 정원 한가운데, 문이 하나 서 있다!
그때는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만화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자, 가서 문을 열어봐!"
이 때는 영상을 열심히 찍던 때가 아니라, 고투어가 뭘 원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가서 열린 문을 닫았다 열었다 닫는 수밖에. 근데 그냥 닫으면 어쩌냔다. 그럼 난 어쩌라고? 뭘 하라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게다가 다시 하긴 이미 늦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삐뚤빼뚤한 영상만 하나 남겨왔다. 고투어도 나도 영상에 문외한이던 시절. (지금도 사실 배워가는 중이지만!) 요즘도 가끔 꺼내 보면 재밌는 추억 중 하나가 되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로공원도 있다. 미로 안을 헤매다 보면 종도 만나게 되는데, 요게 또 재미가 쏠쏠하다. 종을 땡치고 돌아서는 느낌. 뭔가를 찾았다며 선언하는 느낌!
본격적으로 오르막으로 오르기 전에 카페에서 잠시 쉬어도 본다. 시원해진 날씨에 야외 자리에 앉아본다. 시원한 음료가 갈증을 식혀준다. 준비가 됐다! 이제 올라가 보자!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꼭대기쯤에서 팜파스를 만나게 된다. 이때, 팜파스라는 식물을 처음 봤는데, 그 크기에 놀랬다. 그냥 작고 웬만했으면 아~갈대나 억새겠구나라고 했을 텐데. 고투어보다 훨씬 더 크고 억센데, 끄트머리에 달린 부분은 왠지 솜털처럼 보들보들할 거 같다. 팜파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재미도 쏠쏠했다.
팜파스원을 지나면 핑크뮬리가 가득이다. 넓은 운동장도 함께 있어서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불며 놀거나, 뛰어다닌다. 나도 여기서 마음에 꼭 드는 사진을 한 장 얻었다. 바로 이 글의 제목에 함께 있는 사진, 고투어의 뒷모습이다. 꽤 마음에 들어, 아이패드의 배경화면으로 해 놓기도 했다. 그래선가, 아이패드를 열 때마다 여기, 청송수목원이 떠오른다. 아, 그 팜파스있던 곳!
옹기종기 모여있는 빨갛고 키가 큰 꽃무릇이 보인다면, 이제 이 수목원과도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깊숙한 숲속에 피어있는 빨간 꽃들은 그늘에 가려져 더 몽환적으로 보인다.
다 왔구나. 끝이네. 이제 주차장이야. 오늘도 잘 놀았지?
다음에 또 오자!
p.s. 사진을 저장해 놓는 프로그램에 "몇 년 전 오늘"로 뜨는 스토리 폴더가 있다. 알림이 와서 보니, '2년 전 오늘' 나는 이 곳에 있었더라. 추억을 되새기며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