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커다란 고통 없이 인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운명을 가진 것이지, 가장 큰 기쁨이나 엄청난 즐거움을 누린 것이 아닌 것이다. 최고의 기쁨을 누린 것으로 인생의 행복을 측정하려는 사람은 잘못된 기준을 선택한 것이다. 쾌락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극도의 행복과 고통이 번갈아가며 찾아오는 삶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삶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나는 고통을 견디는 데 익숙해.'라는 생각으로 전자를 선택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극한의 행복은 일시적이고 곧 그 이상의 극한을 찾게 하며 영원하지 않기에 더 큰 고통을 낳곤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선택지라고 쇼펜하우어는 이야기합니다.
극한의 행복을 추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부자가 되고 싶고 누구보다 높은 명예를 가지고 싶었으며 누구보다 건강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누리는 삶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투자라며 경제적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기도 했고, 일도 열심히 해서 승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 주말이면 제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열심히 즐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극한의 행복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렇듯 투자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승진은 열심히 일하는 순으로 시켜주지 않는다는 아픈 진리를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취미생활은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지만 최고로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얻은 것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는 트라우마로 남아 결국 '고통이 새겨진 삶'으로 변해버렸죠. 극한의 행복을 추구했지만 결국 남겨진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과도하고 급한 행복, 즉 쾌락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쾌락은 절대 채워질 수 없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공허함과 고통의 진폭을 더 크게 만들 뿐이기에 과도한 쾌락보다는 고통을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젊어서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고 '도전'이라고 느끼고 이겨내곤 합니다. 고통에 대한 민감함이 그래도 덜하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커져서 조금만 덜 가져도, 덜 먹어도, 덜 행복해도 불행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불행해지는 이유이기도 하죠.
행복은 꽤나 거창하고 거대하며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감수성이 적기에 행복이 엄청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큰 행복을 기대하며 그 대단한 것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며 고통을 감내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기에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잊고 살며, 결국 행복은 내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살게 되니까요.
오늘 고통스럽지 않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별 탈 없이 하루를 살아냈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등 따습게 잠을 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갈등 없이 가끔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보냈다면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극한의 행복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행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보다 더한 행복을 찾는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 소소한 행복이야말로 큰 부자들도, 높은 명예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갖고 싶은 행복일 겁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릴수록 고통도 심한 법이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보세요. 불편한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게 한다면 인간관계를 단순하고 담백하게 만들어 보세요. 과도한 빚이 괴롭게 한다면 투자대신 빚을 줄여나가 보세요. 극단적인 다이어트가 나를 괴롭게 한다면 조금은 완만하고 건강한 수준으로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 보세요.
덜 고통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인생의 굴곡 속에서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생겨납니다. 누구나 다르죠. 남들만큼 고통에 대한 역치가 크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치를 하루아침에 키울 수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살만큼 살았고, 어느 정도 그릇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으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고통의 역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준을 느끼고, 그 역치보다 적은 고통으로 인생을 유도해야 합니다. 역치보다 큰 고통은 우리를 힘들게 할 테니까요. 결국 덜 행복하게 할 테니까요.
감당할 수 있는 고통 속에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과하게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최대한으로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그릇이 있든, 각자의 행복과 불행에도 그릇이 있기 마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