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항쟁 뒷이야기-1]
피폐해진 대한제국의 황실 금고를 채우기 위해 제주도로 파견된 봉세관의 세폐(稅弊)와 그 봉세관의 마름 역할을 한 천주교의 교폐(敎弊)는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급기야 제주 민중과 천주교도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민란으로 번지게 된다. 이것이 일명 이재수의 난, 신축년 제주민중항쟁이다. 이재수난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황기연은 1901년 6월 5일 제주목 찰리사에 임명되어 참령 윤철규(尹喆圭) 등과 함께 강화도 군인 3백 명을 인솔하고 제주와 인천을 왕복하는 정기선 현익호(顯益號)편으로 인천 부두를 출발하여 제주도에 부임하였다. 찰리사 황기연이 민란 발생 원인인 천주교인(天主敎人)의 교폐(敎弊)와 봉세관(封稅官) 강봉헌(姜鳳憲)의 세폐(稅弊)를 현장 조사하여 대한제국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보고서 내용은 평리원 재판 과정에서 이재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장두가 받은 피의사실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 재판은 프랑스의 입김 아래 천주교 측 신부와 인사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폐를 저지른 봉세관 강봉헌은 무죄 방면돼 고향으로 도망가고, 교폐를 일삼은 천주교측도 민란의 피해자로만 규정되었다. 오로지 이재수를 비롯한 세 사람만이 민란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대한제국 망조(亡兆)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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