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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Jan 15. 2024

에필로그

이재수 실긔-夜月의 한라산

신축년 제주항쟁의 장두 이재수가 태어난 곳은 대정골 인성리다. 대정 고을⁰은 보성·안성·인성리를 통칭하는 지명인데 대정현을 설치할 당시 대정골 서쪽에 있던 '한괴'라는 지명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한'은 크다 해서 '대(大)'라 하고, '괴'는 정숙한 곳을 말하므로 '정(靜)'이라는 한자를 빌려 '대정(大靜)'이라 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모슬포항이 개발되고 대정고을에 있던 면사무소와 소학교가 바닷가 쪽 하모리로 옮겨 가면서 신흥지역인 모슬포가 대정면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모슬포'는 해변에 백사장이 깔린 바닷가로 ‘모살개'로 불리던 곳이었다. ‘모살'⁰⁻¹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인데, 모살개는 제 이름을 지키지 못하고 모슬포(瑟浦)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슬포를 일러 사람 살기 어려운 동네라는 우스갯소리로 ’못살포‘라 하기도 했다.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도 모슬포는 가장 척박한 서쪽 끝 변방이었다. 겨울이면 사나운 북풍이 몰아쳐 안 그래도 한 많은 유배인 적거지(謫居地)인 이곳은 더욱 을씨년스러운 풍경으로 변하였고, 외지인들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못살포‘라 지레 생각했을것이다.     

 

그런데 대정골을 역향(逆鄕)⁰⁻²이라 하던가? 이곳에서 일어난 강제검란, 방성칠란, 이재수란의 궐기는 산방산이나 바굼지오름처럼 평지에 당돌하게 솟아오른 산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제주4·3항쟁의 유격대 사령관인 김달삼도 대정골의 변두리 영락리 출신이다.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李承晉)이며, 이재수와는 같은 고부이씨(古阜李氏)로 두 사람 모두 기묘사화로 유배를 오면서 제주 중시조가 된 이세번(李世蕃)의 후손이다. 고부이씨 제주 중시조 이세번에 대해서는 아래에 간략하게 써 놓았다.


대정성(大靜城)이 자리 잡았던 대정골 출신 중에는 모슬포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유배 문인들로부터 얻어 들은 대정골 사람들 머리 속 먹물 탓도 있으렷다. 대정현 관아가 있던 성내(城內) 사람들은 해안가 모슬포 출신을 비린내 나는 ’갯것‘들이라 얕잡아 낮게 보던 내력이 근래까지 이어진다.     

 

육지 사람 김영남 시인이 2001년에 펴낸 시집 <모슬포 사랑>의 첫 장에 그의 시「모슬포에서」가 실려 있다. 시인은 파도처럼 서글픔이 몰려오는 모슬포의 가을밤을 그렸다. 하필 비까지 내렸으니 사랑의 이별이 더욱 사무쳤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곧 모슬포 조랑말처럼 세상일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겠노라 자신을 위로한다. 그가 모슬포 사람, 대정몽생이⁰⁻³ 조상들이 살아낸 역사를 제대로 알고서야 몹쓸 여자와의 이별만을 슬퍼했을까! 


모슬포에서

                   김  남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 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모-스-을 하고 뱃고동처럼 길게 발음하면

자꾸만 몹쓸 여자란 말이 떠오르고,

비 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이 나겠네.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잘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경(景)에서.     


고부이씨(古阜李氏)들의 고집과 반항

대정고을⁰⁻¹에 솟아있는 오름은 이름부터 다르다. 유배지식인들의 고장이라 그런지 산봉우리를 두고도 오름이나 봉(峰)과 악(岳) 대신에 죄다 산(山)이라 불린다. 산방산(山房山), 군산(軍山) 송악산(松岳山), 단산(簞山)이 그렇다. 이들 모두는 평지돌출(平地突出)이라 당돌하다. 이런 산세 때문일까? 이 고을은 자고로 민란의 진원지였고, 역향(逆鄕)의 멸칭(蔑稱)을 받기도 했다. 강제검난, 방성칠난에 더해, 1901년 신축항쟁의 장두(狀頭) 이재수와 1948년 제주4·3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은 이 산세를 타고 태어나 그 품 아래에서 자랐다. 김달삼(金達三)의 본명은 이승진(李承晉)이다.    

  

역향(逆鄕)이라니 풍수(風水)만이랴! 이에 더해 핏줄도 한몫했으리란 짐작(斟酌)이다. 대정골 인성리(仁城里)에서 태어난 이재수와 멀지 않은 이웃 마을 영락리(永樂里) 출신인 이승진은 모두 고부이씨(古阜李氏) ‘우던'⁰⁻⁴이다.      


그들의 혈연이 이어진 이야기는 멀리 조선조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⁰⁻⁵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화(史禍)를 입고 제주 유배를 와서 고부이씨(古阜李氏) 벽동공파(碧潼公派) 입도조(入島祖)가 된 백산(白山) 이세번(李世蕃)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재수는 이세번의 12세 손, 이승진은 14세손이기 때문에, 이세번(李世蕃)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대정골 학동들을 훈도하던 대정향교의 훈장을 이세번의 후손들이 대대로 맡았다고 전한다.      


일찍이 김태능(金泰能) 선생이 이에 대하여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攷)에 쓴 글을 뽑아서 아래에 옮긴다.

이세번(李世蕃)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安置)

이세번은 고부(古阜) 후인(後人)으로 전관직(前官職)은 도사(都事)¹였다. 그는 중종(中宗)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남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冤)하다가 화(禍)를 입어 제주의 대정현(大靜縣)에 유배안치(流配安置) 되었던 것인데 그는 결국 대정배소(大靜配所)에서 적사(謫死)²하였다.      

세번(世蕃)은 본시(本是) 유사(儒士)로써 학문을 좋아하여 타인에게도 독서를 권면(勸勉)하였으며 항상 충효와 우애와 신의를 강조하였고 또 이것으로써 그들을 계교(戒敎)하였다고 한다.

중종(中宗) 14년 11월 15일 야(夜) ’北門의 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이 체포(逮捕) 하옥(下獄)됨에 당시 광조(光祖)의 경향각지(京鄕各地)의 문인(門人)³과 관학유생(館學儒生)⁴ 등 수백 명이 광화문 앞에 모여 광조(光祖)의 원통함을 소변(訴辯)⁵하였고 정신(廷臣) 중에서도 궐내대정(闕內大庭)에서 호곡(號哭)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때 세번(世蕃)도 유사(儒士)로써 이 대열에 정신부참(挺身赴參)⁶하여 선두에 서서 광조(光祖) 등의 무죄함을 신면역쟁(伸免力爭)⁶하였다. 이처럼 모든 선비와 정신(廷臣)들의 노력은 필경(畢竟)⁷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으므로 광조(光祖) 등을 사형에 처하려고 책동하는 반대파의 흉계는 좌절되었고 광조(光祖) 등 일파는 귀양만 가게 되었다.     

세번(世蕃)은 당시 비록 한낱 유사(儒士)요 관직(官職)도 도사(都事)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일신생명(一身生命)과 지위(地位)의 위태로움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 신구(伸救)⁸ 항소(抗訴)하였던 것이니 그는 본시(本是) 절의(節義)와 충성(忠誠)과 신의(信義)의 정신이 강한 사람인 까닭에 충량(忠良)의 사(士)가 간흉배(奸凶輩)의 무잠(誣賺)⁹에 의하여 화(禍)를 당하고 있는 것을 차마 좌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 후에 반대파에서는 이세번(李世蕃)도 광조(光祖) 등을 옹호하는 일당이라 하여 그도 잡아서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 안치한 것이었다.     

제주 내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는 대정현(大靜縣) 둔포(屯浦)⁹⁻¹였다고 하며 그의 묘소(墓所)도 둔포적소(屯浦謫所)에서 오랫동안 행적(行積)¹⁰한 세월을 보내다가 여기서 득병적사(得病謫死)하였는데, 그의 부인과 두 아들¹⁰⁻¹도 병중(病中)의 부친을 간호하기 위하여 적소(謫所)에서 동거¹¹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거후(死去後)의 유해는 육지(陸地)에 반장(返葬)¹²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처자(妻子)도 계속 이곳에 영주(永住)하였던 것이다. 생각컨대 아들 형제가 대정(大靜)에 영주한 이유는 학문과 효도와 예절을 존중히 하는 부훈(父訓)을 지키고 유지(遺志)를 받들어 거상(居喪)¹³ 3년 동안 묘측(墓側)에서 여막생활(廬幕生活)¹⁴을 하면서 수묘(守墓)하였던 것이오, 그 후에도 부모묘(父母墓)만 남겨두고 멀리 육지로 떠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오, 또 한가지는 유형자(流刑者)의 가족들이므로 관(官)에서나 사회에서 차별시하고 냉대를 받는 것이 더욱 아니꼬와서 출륙(出陸)치도 않고 부(父)의 종신지(終身地)인 대정(大靜)에 계속 정주(定住)한 것인 듯도 하다.    

이상과 같이 그 아들 형제가 이 지방에 정주(定住)하였으므로 그 후에 그 자손들이 번영하여 대정현(大靜縣) 일대(一帶)에 대씨손(大氏孫)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영조 15년에는 그의 후손(後孫) 중 이구성(李九成)이 정시(庭試)¹⁵에 등제(登第)하여 문과(文科) 외직(外職)¹⁶으로 삼례(參禮)¹⁶⁻¹ 찰방(察訪)¹⁷과 내직(內職)¹⁸으로는 좌랑(佐郞)¹⁹을 지내었다. 세번(世蕃)의 후손들의 일부는 대정(大靜) 이외(以外)의 북제주군 애월면내(涯月面內)에도 집단거주(集團居住)하고 있다고 한다.     

기묘록(己卯錄)에 의하면 동서(同書) 별과(別科)²⁰ 피천조(被薦条)에 ’(都事 李世蕃 有學問操守 도사 이세번은 학문이 있고 지조를 지킴.)‘라 하였고, 또 동서(同書) 유사조(儒士条)에도 이세번(李世蕃)이 녹명(錄名)²¹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는 학자(學者)였고 마음이 굳세고 절조(節操)가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또 현재의 그의 후손중(後孫中)에 한학(漢學)과 한시(漢詩) 등에 조예(造詣)가 있는 사람들이 많은 점으로 보아 그것은 호학(好學)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가풍(家風)인 듯도 하며 또 그 후손중(後孫中)에는 민중(民衆)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의기(義氣)를 발(發)한 사람과 또 자기가 신봉하는 바를 굳게 지켜 생명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겼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니(특히 성교란시·聖敎亂時에 그 후손중에서 이 정신이 더욱 발휘되었다.)²¹⁻¹ 이는 모두 선조(先祖) 이세번(李世蕃)의 의기심(義氣心)과 조수(操守)의 정신이 면면(綿綿)히 계승된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며, 또 그가 적거(謫居)하였다는 인근지(隣近地)인 무릉도원지방(武陵桃源 地方)²²은 대정현내(大靜縣內)에서도 변지(邊地)²³이나 옛적에 그 주민들이 학문을 닦아 국시(國試)에 등과(登科)한 자(者)들이 종종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는 이세번(李世蕃)이 이 지역에 적거(謫居)할 때 그 촌락(村落)의 자제(子弟)와 유생(儒生)들에게 학문을 권면지도(勸勉指導)하고 예절(禮節)로서 계교(啓敎)²⁴하였던 까닭에 그 영향과 전통이 그 주민들 사이에 계승 유지되어 학문지대(學問地帶)로 되었던 것인 듯하다. <己卯錄, 古阜李氏 濟州派 譜行狀, 濟州大靜旌義 三邑誌>

대정향교와 지붕 너머로 보이는 바금지오름과 산방산의 모습
백산 이세번의 묘 전경

옮긴 이의 주(註)

⁰대정고을-1416년(태종 16년) 제주 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吳湜)이 제주의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해 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구하였다. 이에 태종은 종래의 제주목을 제주목·정의현·대정현 세 고을로 나누고, 여기에 17개의 속현(屬縣)을 모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이로써 제주의 행정 구역은 한 고을에서 세 개의 고을로 개편되어 삼읍 체제(三邑體制)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삼읍 체제는 한말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914년에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 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삼읍의 행정 구역 가운데 일반적으로 대정현은 강정에서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였다. 모슬포는 일제시기 모슬포항이 개발되고, 대정고을(보성·안성·인성리)에서 면사무소와 소학교가 이전해온 후부터 대정면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⁰⁻¹모살-‘모래'의 제주 방언으로 모슬포와 같은 지명에서 보인다. ‘모슬포'는 ‘모살개'로 불리던 지역으로 모래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모살'은 ‘모래'와 연관이 있을 거 같긴 한데 그 어휘사를 분석하기가 까다롭다. 우선 ‘모래'는 원래 ‘몰개'였다가 ㄱ 약화로 ‘몰애’가 되고 연철로 인해 ‘모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방언형에 ‘모새/모쌀(경남)’, ‘목살/모사(전남)’이 있는 것으로 보아 ‘ㅅ'이 존재하던 말이 15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였지 않나 싶다.

⁰⁻²역향(逆鄕)-역적이 난 고을.

⁰⁻³대정몽생이-몽생이는 ’어린 새끼말‘을 일컫는데, 대정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정 몽생이는 요망져’라는 말이 있다. ‘요망지다’는 ‘기운차다, 지혜롭다, 영리하다, 똑똑하다’라는 뜻을 가진 제주어다.

⁰⁻⁴우던-친족, 겨레붙이(等), 따위, 무리를 일컫는 제주어.

⁰⁻⁵기묘사화(己卯士禍)-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중종의 주도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정광필, 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설에는 이를 중종의 친위쿠테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¹도사(都事)-의금부 도사. ‘李世蕃 珥事罷斥(이세번 의금부도사에서 파직되었다.)' <학포집의 부록 기묘당금록>

²적사(謫死)-귀양 간 곳에서 죽음.

³문인(門人)-문하생(門下生)

⁴관학유생(館學儒生)-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기숙하던 유생.

⁵소변(訴辯)-호소하고 변호함.

⁶정신부참(挺身赴參)-앞장서서 나감.

⁷필경(畢竟)-마침내는

⁸신구(伸救)-죄 없는 사람을 사실(事實)대로 변명(辨明)하여 구원(救援)함.

⁹무잠(誣賺)-속여서 무고함.

⁹⁻¹둔포(屯浦)-속칭 된개 또는 뒌개라 함. 현 대정읍 신도리 포구이며 '된개‘ 가까이에 있던 마을을 돈포리(敦浦里), ’뒌가모(아래아 발음)을’이라 하였으며, 18세기에는 돈포리(頓浦里)로 표기했다.

¹⁰행적(行積)-조광조가 내세운 현량과(賢良科)의 칠조목(七條目)-성품(性品), 기국(器局), 재능(才能), 학식(學識), 행실(行實), 행적(行積), 지조(志操) 중 하나.

¹⁰⁻¹아들-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공부 중이던 큰아들 이충현은 제주 교수로 천거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 향교의 훈장(訓長)을 역임하였다.

¹¹적소(謫所)에서 동거-유배자의 가족이나 노비(奴婢)는 동거할 수도 있었음.

¹²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다가 장사를 지냄.

¹³거상(居喪)-상(喪) 중에 있음.

¹⁴여막생활(廬幕生活)-오두막 생활.

¹⁵정시(庭試)-대궐 안마당에서 임금의 친림하(親臨下)에 보는 과거(科擧).

¹⁶외직(外職)-지방(地方) 각 관아(官衙)의 벼슬.

¹⁶⁻¹삼례(參禮)-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¹⁷찰방(察訪)-각 도의 역참(驛站) 일을 맡아보던 외직(外職) 문관 벼슬.

¹⁸내직(內職)-중앙관서에 있는 각 관아(官衙)의 벼슬.

¹⁹좌랑(佐郞)-조선의 육조(六曹) 정육품 벼슬.

²⁰별과(別科)-조선시대 과거(科擧)에서 본과(本科) 이외에 따로 설치한 과(科)로, 정기시(定期試)가 아닌 부정기시(不定期試)를 말함.

²¹녹명(錄名)-이름을 적음.

²¹⁻¹신축년 제주민중항쟁의 장두 이재수를 말함.

²²무릉도원지방(武陵桃源 地方)-대정현(大靜縣) 무릉리(武陵里)와 도원리(桃源里) 일대인 현 신도리의 ’된개‘ 지역을 말함.

²³ 변지(邊地)-변두리땅.

²⁴계교(啓敎)-일깨워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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