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 실긔-夜月의 한라산
이세번(李世蕃)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安置)
이세번은 고부(古阜) 후인(後人)으로 전관직(前官職)은 도사(都事)¹였다. 그는 중종(中宗)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남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冤)하다가 화(禍)를 입어 제주의 대정현(大靜縣)에 유배안치(流配安置) 되었던 것인데 그는 결국 대정배소(大靜配所)에서 적사(謫死)²하였다.
세번(世蕃)은 본시(本是) 유사(儒士)로써 학문을 좋아하여 타인에게도 독서를 권면(勸勉)하였으며 항상 충효와 우애와 신의를 강조하였고 또 이것으로써 그들을 계교(戒敎)하였다고 한다.
중종(中宗) 14년 11월 15일 야(夜) ’北門의 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이 체포(逮捕) 하옥(下獄)됨에 당시 광조(光祖)의 경향각지(京鄕各地)의 문인(門人)³과 관학유생(館學儒生)⁴ 등 수백 명이 광화문 앞에 모여 광조(光祖)의 원통함을 소변(訴辯)⁵하였고 정신(廷臣) 중에서도 궐내대정(闕內大庭)에서 호곡(號哭)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때 세번(世蕃)도 유사(儒士)로써 이 대열에 정신부참(挺身赴參)⁶하여 선두에 서서 광조(光祖) 등의 무죄함을 신면역쟁(伸免力爭)⁶하였다. 이처럼 모든 선비와 정신(廷臣)들의 노력은 필경(畢竟)⁷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으므로 광조(光祖) 등을 사형에 처하려고 책동하는 반대파의 흉계는 좌절되었고 광조(光祖) 등 일파는 귀양만 가게 되었다.
세번(世蕃)은 당시 비록 한낱 유사(儒士)요 관직(官職)도 도사(都事)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일신생명(一身生命)과 지위(地位)의 위태로움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 신구(伸救)⁸ 항소(抗訴)하였던 것이니 그는 본시(本是) 절의(節義)와 충성(忠誠)과 신의(信義)의 정신이 강한 사람인 까닭에 충량(忠良)의 사(士)가 간흉배(奸凶輩)의 무잠(誣賺)⁹에 의하여 화(禍)를 당하고 있는 것을 차마 좌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 후에 반대파에서는 이세번(李世蕃)도 광조(光祖) 등을 옹호하는 일당이라 하여 그도 잡아서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 안치한 것이었다.
제주 내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는 대정현(大靜縣) 둔포(屯浦)⁹⁻¹였다고 하며 그의 묘소(墓所)도 둔포적소(屯浦謫所)에서 오랫동안 행적(行積)¹⁰한 세월을 보내다가 여기서 득병적사(得病謫死)하였는데, 그의 부인과 두 아들¹⁰⁻¹도 병중(病中)의 부친을 간호하기 위하여 적소(謫所)에서 동거¹¹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거후(死去後)의 유해는 육지(陸地)에 반장(返葬)¹²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처자(妻子)도 계속 이곳에 영주(永住)하였던 것이다. 생각컨대 아들 형제가 대정(大靜)에 영주한 이유는 학문과 효도와 예절을 존중히 하는 부훈(父訓)을 지키고 유지(遺志)를 받들어 거상(居喪)¹³ 3년 동안 묘측(墓側)에서 여막생활(廬幕生活)¹⁴을 하면서 수묘(守墓)하였던 것이오, 그 후에도 부모묘(父母墓)만 남겨두고 멀리 육지로 떠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오, 또 한가지는 유형자(流刑者)의 가족들이므로 관(官)에서나 사회에서 차별시하고 냉대를 받는 것이 더욱 아니꼬와서 출륙(出陸)치도 않고 부(父)의 종신지(終身地)인 대정(大靜)에 계속 정주(定住)한 것인 듯도 하다.
이상과 같이 그 아들 형제가 이 지방에 정주(定住)하였으므로 그 후에 그 자손들이 번영하여 대정현(大靜縣) 일대(一帶)에 대씨손(大氏孫)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영조 15년에는 그의 후손(後孫) 중 이구성(李九成)이 정시(庭試)¹⁵에 등제(登第)하여 문과(文科) 외직(外職)¹⁶으로 삼례(參禮)¹⁶⁻¹ 찰방(察訪)¹⁷과 내직(內職)¹⁸으로는 좌랑(佐郞)¹⁹을 지내었다. 세번(世蕃)의 후손들의 일부는 대정(大靜) 이외(以外)의 북제주군 애월면내(涯月面內)에도 집단거주(集團居住)하고 있다고 한다.
기묘록(己卯錄)에 의하면 동서(同書) 별과(別科)²⁰ 피천조(被薦条)에 ’(都事 李世蕃 有學問操守 도사 이세번은 학문이 있고 지조를 지킴.)‘라 하였고, 또 동서(同書) 유사조(儒士条)에도 이세번(李世蕃)이 녹명(錄名)²¹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는 학자(學者)였고 마음이 굳세고 절조(節操)가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또 현재의 그의 후손중(後孫中)에 한학(漢學)과 한시(漢詩) 등에 조예(造詣)가 있는 사람들이 많은 점으로 보아 그것은 호학(好學)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가풍(家風)인 듯도 하며 또 그 후손중(後孫中)에는 민중(民衆)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의기(義氣)를 발(發)한 사람과 또 자기가 신봉하는 바를 굳게 지켜 생명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겼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니(특히 성교란시·聖敎亂時에 그 후손중에서 이 정신이 더욱 발휘되었다.)²¹⁻¹ 이는 모두 선조(先祖) 이세번(李世蕃)의 의기심(義氣心)과 조수(操守)의 정신이 면면(綿綿)히 계승된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며, 또 그가 적거(謫居)하였다는 인근지(隣近地)인 무릉도원지방(武陵桃源 地方)²²은 대정현내(大靜縣內)에서도 변지(邊地)²³이나 옛적에 그 주민들이 학문을 닦아 국시(國試)에 등과(登科)한 자(者)들이 종종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는 이세번(李世蕃)이 이 지역에 적거(謫居)할 때 그 촌락(村落)의 자제(子弟)와 유생(儒生)들에게 학문을 권면지도(勸勉指導)하고 예절(禮節)로서 계교(啓敎)²⁴하였던 까닭에 그 영향과 전통이 그 주민들 사이에 계승 유지되어 학문지대(學問地帶)로 되었던 것인 듯하다. <己卯錄, 古阜李氏 濟州派 譜行狀, 濟州大靜旌義 三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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