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나마 잊고있던 비란 놈이
다시 고개를 드밀었지만
워낙 바쁜 탓에 매정하고 무심해진 나는
타닥타닥 달려와 내게 인사하는 빗방울을 본체만체,
반가운 기색 하나 내비치질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않고 내 우산을 두들겨가며
내게 열심히 알은척을 하는 애틋한 빗줄기를
결국에는 외면하지 못하고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빗물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자
기쁨의 빛이 다채롭게 번져 회색 도시를 물들인
자신이 늘 바라보고 있던 아름다운 세상을
그는 내 눈앞에도 너르게 펼쳐 보여주었다
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 급하게 나를 불렀던가,
그를 외면했던 나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달아오른 얼굴을 한 줄기 바람이 식혀주는
가을을 머금어 적당히 시원한 공기 가운데
온기가 감도는 주홍빛 단풍빛 가로등 아래서
불투명한 우산에 가려서 그간 보지 못했던 광경.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방에 주눅이 들어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숙인 채 땅만을 보고 걷던
나의 좁은 시야에는 담기지 않았던 그 빛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된 것은
차가운 듯 따스한 빗물의 덕.
재빠른 듯 느긋한 빗물의 덕.
번거롭지만서도 반가운 빗물의 덕이다.
야, 얼마만에 비냐.
두껍고 검은 하늘을 찢어가며 힘겹게 나를 만나러 온 비.
나는 그제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반가운 얼굴을 마주보며
짧지만 신중한 한 마디 입 밖으로 씹듯이 내뱉는다.
무어라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러나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빗물은
다정한 가족사진 속 부모님의 얼굴처럼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변함없이 머금은 채
무미건조한 세상을 기쁨으로 조금씩 적셔갈 뿐이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는 빗소리로부터 어떤 대답이라도 들은 양,
빗물을 닮은 온화한 깨달음의 미소를 지어보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의 느린 걸음이 세 발짝도 채 내딛지 않은 그 짧은 새에,
빗물은 다시 조-금씩 잦아들어간다.
다음에 또 보자.
듣는 이 없이 허공에 흩뿌려진 그 말은
여전히 젖은 듯 반짝이는 불빛들과 어우러져 하늘을 날았다.
그를 지켜보던 나는 축축한 우산을 접어 가볍게 툭툭 털어내고는
완전히 멎지 않은 얇고 가는 비의 가루를 온몸으로 맞는다.
다음 가로등, 다음 가로등, 또 다음 가로등을 향해서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던 중 빗방울 하나가 투명했던 안경알에 툭 내려앉아
나의 시야를 흐려가며 마지막으로 나와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나뭇잎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선 내 정수리를 적시는
짖굳은 장난을 한 번 걸어보고난 뒤에야
그제야,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졌다.
정말 간건가-곧 다시 돌아오겠지만,
밀려드는 아쉬움에 나뭇잎을 올려다 보았지만
비가 남기고 간 물기에 잎은 더욱 진한 빛으로 번뜩일 뿐
더 이상 빗물을 떨구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쉬운대로 길가에 얕게 고여있는 웅덩이에 발을 담궈보았다
그래도 뭔가 부족해서 내 얼굴도 한 번 비추어본다
물결이 바람에 흔들려 나의 얼굴도 함께 흔들거린다
춤을 추듯 흔들리는 몸이 보이고
미소짓듯 일렁이는 입꼬리가 보여서,
마침내 나의 입꼬리도 미소를 되찾은 후에,
그때에야 나는 미련없이 가던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