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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하마 Jan 29. 2024

육아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3

꿈꾸던 일상 2. 예쁘게 플레이팅한 아침식사와 모닝커피 즐기기

까맣던 하늘이 서서히 네이비색으로, 푸른색으로, 하늘색으로 변해가고

간간히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아침.

부스스 일어나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창문을 활짝 연다.

미지근한 물로 세안을 한다.

상쾌한 느낌으로 천천히 물을 한 잔 마신다. 

이 모든 과정이 슬로모션처럼 나른하고 여유가 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고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난다.


냉장고에서 알록달록 싱싱한 채소들과 훈제된 고기를 꺼낸다.

채소는 단정하게 썰어 물에 살짝 데치거나 볶는다.

고기는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돌렸더니 금세 맛깔나게 윤이 난다.

나무 쟁반에 올려뒀던 단호박도 나박나박 정갈하게 썰어 찐다.

동그랗고 세련된 마리메코 접시에 이 재료들을 아주 정성스럽게 플레이팅한다.

영양 가득한 음식들로 오색을 아름답게 갖췄다.

플레이팅한 접시와 예쁜 수저를 나무 쟁반에 또 올린다.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그 옆에 놓으면 아침 한 끼 플레이팅 완성.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예쁜 한 끼, 천천히 한 입씩 음미하며 먹는다.

향긋한 모닝커피와~로 시작되는.. 90년대 후반을 평정했던 어느 남자 아이돌그룹의 달달한 발라드노래가 떠오를 만큼 평화롭고 벅차오르는 순간이다.

매일 아침 이렇게 벅차오르는 순간을 느낀 후 여유롭게 출근한다.

워낙 일찍 일어난 탓에,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도 학교에 도착하면 아직 학생들이 거의 없이 조용하다.

조용하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니 삶의 질이 올라간다.


이상, 내가 꿈꾸는 30대 커리어우먼의 아침시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30대 초반부터 워킹맘이 된 나는 전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하늘이 아직 네이비색일 때 알림을 듣자 마자 총알처럼 침대에서 튕겨져 나온다.

아직 자고 있는 따님이 좀 더 오래 푹 자주길 바라며 공기처럼 살금살금, 그러나 바람처럼 빠르게 부엌으로 나간다. 

스트레칭과 세안을 하거나 물을 마실 여유 따위 없다. 밥솥 취사버튼부터 누르고, 머리카락을 1초만에 질끈 묶고 냉장고에 있는 채소와 고기를 꺼내 휘리릭 씻고 마구마구 다진다. 한꺼번에 마구마구 볶는다.

따님은 후식으로, 남편님은 아침 수영강습 후 출근 전 간단히 먹을 토마토주스까지 만든다. 토마토를 썰어 놓고 꿀과 물을 조금 넣고 사정없이 갈면 된다. 플레이팅따위 없다. 그냥 빈 그릇에 처넣는다.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따님이 아침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이미 진작부터 깬 따님은 잠옷바람에 머리가 부스스한 채로 총총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요리하는 내 주변에서 동동 맴돌고 있다. 드라마나 공익광고에 나오면 참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일 텐데 내게는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없다. 7시쯤부터 따님과 아침밥을 먹어야 따님은 어린이집에, 나는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닝커피가 생각날 겨를도 없다. 모닝커피는 오늘 어쩌다 1교시 수업이 없는 날이면 운좋게 마시는 음료수에 불과하다. 집에서 여유롭게 즐긴다는 것은 꿈꾸지 못한다.


나는 급한 마음에 후루룩 마시듯 아침을 먹었는데, 따님은 밥알을 세면서 각종 수다를 떨고 까불며 아침밥을 즐긴다. 자주 반찬투정까지 하면서.. 급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한 영양 가득한 반찬들을 홀대하며 김이나 달라고 땡깡이다. 8시 20분에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8시가 가까워지도록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그러고 있다.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 꼬맹이를 마음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다행히 쥐어박진 않았지만 대신 그 못지 않게 주는대로 먹으라며 좀 윽박지르고, 또 자괴감에 빠지며... 아니 자괴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치 강제로 커다란 인형을 다루듯 씻기고, 입힌다. 어린이집까지 보내는 일은 친정엄마 찬스. 친정집에 던지듯 따님을 토스한 후 헐레벌떡 학교에 가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왁자지껄한 녀석들이 가득하다. 아... 바로 1교시에 수업이 있는 날인데, 조례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아무리 익숙한 환경이어도 장소가 바뀌며 적응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버퍼링이 꽤 필요한 나인데. 게다가 찐 내향인인 나는 왁자지껄한 곳에서는 더 기가 빨려 버퍼링이 더 오래 걸리는데. 결국 오늘 수업도 업무도 발등에 떨어진 불 끄듯 다급하게 해치워버렸다. 교육활동의 보람과 뿌듯함은 커녕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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