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생각-1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여행
금요일 늦은 밤 경주에 도착했다.
주말이 시작되는 저녁답게 꽉 찬 고속도로를 따라, 딸래미의 지루한 징징거림 속에서, 수많은 차들의 소음 속에서. 그렇게 5시간을 달려 경주에 도착했다.
하필 가장 차가 막힐 것이 뻔한 시간에 장거리 운전을 자처하다니. 이 정도 장거리 여행을 어린 딸래미까지 데리고 즉흥적으로 시작해버리다니. 당연히 내가 시작한 여행이 아니었다. 우리 남편의 작품이었다. 내키지 않았고 당연히 즐거울거라는 기대도 되지 않았지만, 딸아이의 원만한 정서발달을 위해..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것이 그것에 좋다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것은 나에게 여행이 아니라 '가족 단위 현장 체험학습'이었다. 학생들을 인솔해 교사인 내가 체험학습을 다녀오는 것 만큼 부담되는.. 여행이 아닌 하나의 업무.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이 즐겁기보다 부담스러웠다. 주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어딘가를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아빠. 함께 하는 네 식구의 모습만이 행복한 삶의 정석으로 여기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나랑 남동생은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발달장애가 있는 남동생은 어디든 다닐 때마다 한 번 이상 터지는 특유의 텐트럼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가족 여행 명소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어딜 들어가서 구경을 하든 먹든 대기는 필수였고 왜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은 괴성을 지르며 울었다. 다른 일행이 먹는 과자를 휙 낚아채 뺏어먹기도 하고, 다른 테이블 음식을 덥석 집어먹기도 했다. 난감한 엄마아빠는 그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상황이 지나면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며 웃곤 했다. 그러느라 그냥 조용히 옆에 있던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셨을텐데, 나는 정말 너무나 쪽팔리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다 때려치고 혼자 집에 가서 울고 싶었다. 남동생을 쥐어 패주고 싶었다. 남동생을 손가락질하며 구경하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티내면 안 될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 명소와 볼거리들, 남동생을 손가락질하는 잔인한 시선들, 집에 혼자 있었으면 편하게 실컷 볼 SBS인기가요의 신화 오빠들 무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이번 주말에 나는 안 나가고 싶다고,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마치 내가 은둔형 외톨이 성향이라도 있는 아이처럼 취급하곤 했다. 가족이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진짜 행복인거다, 그런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이 바른 마음이다.. 친절한 말투로 함께 하는 여행을 강요받곤 했다. 아, 나의 이런 마음은 이상한 것이구나, 내가 너무 매정하고 이기적인 것인가, 나는 분명히 가족을 소중히하는건 맞는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다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주말 여행을 계속 했고, "저기 경치 봐라 멋있지", "저것 봐 너무 신기하잖아", "이거 너무 맛있지"라며 지속적으로 긍정적이고 즐거운 대답을 요구하는 부모님 말에 억지로 웃곤 했다.
물론 그 시절 가족여행이 매번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 같다. 때로는 재밌고 신나기도 했을 텐데, 분명 내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소중한 경험들이기도 했을 텐데. 부모님도 우리 남매를 위해 많이 노력하셨던 것은 맞는데, 참 안타깝게도 나에겐 좋지 않은 기억을 주로 남겼다.
어른이 돼서야 어린 시절 나의 마음이 비정상이 아니란 걸 알았다. 30대 이후 MBTI성격유형이나 심리학적 지식이 이전보다 대중화되며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나도 내 성향을 더 잘 이해햐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내향적이고, 직관적이고, 감정에 민감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INFJ이다.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는 에너지 충전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빨리 소진하기에 힘겨웠던 것이었다. 직관적 성향이라 경험보다는 읽고 쓰고 상상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에 여행 중 볼거리가 그닥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이 남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정적으로 너무나 예민하게 다가왔고, 내가 불편함을 드러내면 우리 부모님이 힘들 것 같아 그 감정을 꾹꾹 누르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또한 여행지에서는 남동생으로 인해 다양한 돌발상황이 생겨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것도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내가 어린 시절 가족여행이 힘겨웠던 것은 가족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나의 타고난 성향이 그런 상황들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지금도 멋진 여행지에 가면 나랑 남동생을 데리고 또 방문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그게 당연한 부모 마음'이라고 이야기했다.
"너도 엄마 돼 봐라, 좋은 곳은 혼자보다는 가족과 함께 다니고 싶지. 엄마 마음은 당연히 그렇게 돼있어."
하지만 나는 이 '당연한 엄마 마음'이,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도무지 들지 않는다.
엄마가 되자 혼자 조용히 충전할 시간이 더 절실해졌다. 그러자 '당연한 엄마 마음'과는 정 반대로.. 딸래미와 멋진 장소에 방문하면 '아... 지금 여기 나 혼자 와서 편하게 쉬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마음이 든다. 딸래미가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 이제 내가 엄마가 돼서 가는 가족여행 때마다 아주 자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왜 엄마 마음이 아닐까, 우리 딸도 우리 남편도 내게 너무 소중한 건 맞는데, 왜?!
약간의 자책도 잠시. 요즘은 꽤 이기적이고 자기합리화를 잘 하는 엄마가 돼서 오나 도니스의 '엄마됨을 후회함'같은 책을 굳이 찾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모성 신화는 단지 신화일 뿐이며, 엄마들의 마음도 다 다르다고. 그게 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와는 관계없이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 수 있다고. 가족과 소통하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진 않지만 '가끔 힘내서 과제처럼 열심히 하는'것도 괜찮은 거라고.
나는 조금 다른 여행을 하고 싶다.
단 1박 2일이어도 좋으니 혼자 떠나고 싶다.
얼마나 핫플레이스인지, 경치가 멋진지, 음식이 얼마나 맛깔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디든(이왕이면 이동거리가 짧으면 좋겠다. 이동 중 사람들이나 차들이 내는 소음에 시달리는 것도 기가 빨리니까.) 좋으니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머물 수 있으면 좋겠다. 이곳 저곳 찾아다니기보다는 낯설고 조용한 곳에서 머물기만 하고 싶다. 멋진 경치가 아니라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만 보여도 충분하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맛집 대신 조용한 카페가 있으면 좋겠다.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 한상차림 말고,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초코머핀만 먹어도 그 행복감만으로 충분히 배가 부를 것 같다. 여행가방에는 상상거리를 가득 안겨주는 에세이집이나 소설책이 한 권 들어있으면 좋겠다. 내가 온전히 충전할 수 있는 여행이란 이런 여행일 것 같다.
딸아이가 많이 자란 후 혼자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관광 명소는 절대 피하고 싶다. 맛집이라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식당도 마찬가지이다. 대신 낯선 이국 땅에서 가장 한적한 마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오래 머물고 싶다. 그 조용한 마을 곳곳을 하염없이 다니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싶다. 그러다가 카페에 앉아 이 생각들을 하염없이 글로 쏟아내고 싶다. 이 나라에 왔으면, 이 지역에 왔으면 여기는 필수코스지..빨리 움직이자! 하는 부담감은 아예 던져버리고.
'유럽여행'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펠탑이나 콜로세움 앞에서 인증샷을 찍을 생각에 설레지만, 나는 체코의 이름도 생소한 시골마을 카페에서 혼자 읽고 쓰고 상상할 생각에 너무나 설렌다. 나의 이 특이한 여행 취향대로 여행할 날이 얼른 오면 좋겠다. 우리 딸래미, 어서어서 자라주렴.
(딸아이 어린모습이 너무 이뻐 어떤 엄마는 좀 그만 컸으면 좋겠다고도 한다는데... 나는 그런 마음따위 절대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