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랭바레증후군,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선생님, 이제 데드리프트 다시 해봐도 될 거 같아요."
"지난주 허리 삐끗하신 건 괜찮아지셨나요?"
"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좋습니다. 그럼 무게 없이 맨 손으로 천천히 해보도록 할게요."
며칠 쉬고 데드리프트를 시도한다. 지난주, 삐끗했던 등허리 때문인지 유독 더 조심스러워하는 치료사. 당장 약간의 무게라도 올렸다간 지난주와 동일한 상황이 올 거 같다는 우려하에 맨 몸으로 먼저 자세를 잡아본다. 어딘가 이상한데?
"선생님 분명 빈 손인데, 상체가 자꾸 꺾이네요."
"오랜만에 하다 보니 몸이 자세를 잊어버린 거 같은데요? 자 천천히 해볼게요."
"그쵸?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손이 허~하니 상대적으로 몸은 가볍게 느껴지는 반면, 당최 자극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셈. 자극점과 자세는 천천히 찾아보기로 하며 다음 운동으로 넘어간다.
병동을 조깅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근 1년 만에 처음 접해보는 속도에 허우적거리기 바쁜 다리와 부족한 힘으로 인해 너덜거리며 턱턱 땅에 박치기하기 바쁜 발목. 총체적 난국 속에 상체 역시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어어~ 상체 숙이지 말고, 가슴 피셔야 해요~"
치료사의 말에 상체를 들어 올리며,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자체적으로 보폭을 줄인다. 보폭을 줄이니 약간이나마 할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곧 착각임을 깨닫는다. 발목이 살려달라 아우성치고 있었기 때문. 미안해 발목아.
"밍님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컨디션은 괜찮습니다. 갈수록 회복도 더 빠르게 되는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도 요즘 들어 이전에 비해 회복 속도가 부쩍 빨라진 게 보이더라구요. 두 손 놓고 실내 보행 가능하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 혹시 생각해 둔 퇴원 시기가 있으세요?"
"아뇨. 아직은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현행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주치의가 구체적인 퇴원 시기를 물어볼 줄은 예상치도 못했는데?
22년에서 23년으로 해가 바뀜과 동시에 올해 중으론 나가야죠~ 달고 살았던 말이 실현되는 건가 싶다. 그래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당장은 지켜보는 게 맞다는 생각에, 몽글몽글 솟아나는 기대감이라는 거품에 물 한 바가지 쏟아내며 거품을 싹 걷어낸다.
섣부른 거품은 해악이다.
고깔 모양의 컵으로 추정되는 것을 가지고 베드 위에 턱 올려놓는 치료사.
"밍님 옆으로 누워주시구요. 왼쪽 다리는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는 쭉 펴주세요. 이다음에 밑에 있는 다리를 들어 올린 후, 이 고깔을 넘기시면 돼요. 쉽죠?"
"아 이거 그냥 되지 않을까요?"
"한번 해보세요 ^^"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린 뒤 고깔을 넘겨보는데... 어라? 이게 맞나? 코웃음 친 것을 후회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3차례 다리로 고깔을 넘길 무렵, 왼쪽 엉덩이가 파르르 떨려오고, 다리를 들어 올리는 높이도 점차 낮아지기 시작한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어렵죠?"
"하... 네. 와 이거 왜 이렇게 힘들어요."
"그럼 이제 반대로 누워서 오른발로 해보실래요?"
어? 뭐야? 오른발은 왜 이렇게 쉬워?
"오른발은 그냥 되는데요 선생님?"
"그쵸? 이게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예요."
아니.. 이런 건 굳이 안 겪어봐도 되는데.. :(
자리를 옮겨 홈짐 기구를 활용해 레그 익스텐션을 수행한다. 가동범위를 확 줄이고, 중량은 약하게 준 채 반복 횟수를 늘린다. 가동범위를 줄이니 힘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했고, 거기에 횟수까지 늘리니 허벅지에 자극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다. 되려 같은 중량대비 가동범위를 최대로 수행했을 때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다.
"선생님 이게 더 힘들어요."
"그쵸? 한 세트 더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세요!"
주말엔 친구들과 청첩장 모임을 가졌다.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행동반경이 좁은 나를 위해 병원 근처로 와 준 친구들.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며칠 전 만난 것 마냥 이야기꽃을 피운다.
친구가 병원에서 사용하라며 닌텐도 스위치를 빌려주었다.
"이거 퇴원하고 돌려주면 되지?"
"아냐. 퇴원하고 일상이 다시 바빠지면 그때 돌려줘. 그리고 꿀잼해야 빨리 퇴원하지."
헉.. 뜻밖의 대답에 감동을 느낀다.
아는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 오랜만이다. 몸은 좀 어떠냐~?"
"주치의가 실내 보행 가능하면 퇴원해도 좋을 것 같다고, 예정해 둔 시기가 있는지 여쭤보시더라구요."
"야~ 많이 좋아졌나 보네. 다행이다. 와이프가 글 잘 보고 있더라."
"헉 감사합니다. 형수님."
"네가 쓴 거 보면서 엄청 울대~ 밍님 많이 힘들었겠다고. 맘고생 많으셨겠다고. 나는 너랑 이런 씨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하는데 말여."
"아무렴요. 이렇게 연락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아무튼 그랬더니 와이프가 지금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 많이 해주라더라."
"와 형수님 감사합니다."
"에이 감사할 거 까진 아니고~ 무튼 여름방학되면 한번 놀러 갈게~"
"네! 푹 쉬세요."
펑펑 우셨다는 그 말에 당황스러움과 신비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단순히 기록을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누군가의 감정선을 건드릴 줄이야. 뜻밖의 소식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이 공간을 찾고 읽어주심에 깊이 감사할 따름.
청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연극 <당선자 없음>을 시청한다.
와... 이게 진정 예술작품이라는 거지.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주욱 흘러나오며 극이 마무리되는데, 몸에 전율이 돋는다.
극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면, 그 현장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터인데. 그래도 모니터로나마 볼 수 있어 다행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