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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그 자취방 냄새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가끔씩 그 자취방 냄새가 생각난다. 눅눅한 날엔 번개탄 불까지 애를 먹였다. 결국 온 방에는 번개탄 냄새가 진동한다. 시골집에 갔다 오자마자 밥을 해두고 어머니가 챙겨주신 반찬 방바닥에 펼쳐놓는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벽에 걸린 거울에 밥 김 서리기 시작하면 연탄불에 올려 둔 김치찌개도 보글보글 끓는다. 쉰내 나는 김치지만 연탄불 공인지 냄새만으로도 입에 침이 돌았다. 객지생활 설움에 낯선 인심에 배가 곯았는지 그 자취방에선 뭘 먹어도 맛있었다.

   자취방 살이는 차라리 가을 겨울이 나았다. 좁고 후미진 부엌에서 여름을 나자면 곰팡이와의 싸움이었다. 당시 집 떠나온 고등학교 자취생에게 언감생심 냉장고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 대안으로 어머니가 밑반찬 간을 조금 더 짜게 해두지만 여름 장마습기에 무사하기는 힘들었다. 

   그 부엌은 옆방 자취생과 함께 사용하는 공용부엌이었다. 그런 환경은 결코 웃지 못할 의심병을 키웠다. 시골집에서 가져온 감자 몰래 가져갈까, 깻잎 반찬 몰래 먹을까 신경 곤두세우며 살았다. 내심 독립된 부엌이 있는 자취방이었으면 싶었다. 부엌살림이라 해봤자 숟가락 몽둥이 몇 개에 그릇 몇 개 그리고 말썽 많은 곤로가 전부였지만 내 공간을 침범당하지 않는 부엌이었으면 싶었다. 

   언니에게 자취방을 보러 다니자고 했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 보며 집을 둘러보는데 마침 딱 마음에 드는 방이 하나 있었다. 단독부엌은 물론이고 집 출입도 안전한데다 다락까지 있어 더욱 탐이 났다. 특히 내 마음을 혹하게 한 것은 주인집 냉장고 한 귀퉁이에 반찬을 갖다 두어도 좋다는 점이었다.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가격이 문제였다. 사글세 40만원, 살고 있던 자취방보다 10만원이나 비쌌다. 언니는 비싸서 못 간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 집에 가있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주말에 부모님한테 떼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그 공용부엌을 떠나고 말리라.

   늦가을이었다. 고향집으로 가는 차창 밖 풍경은 단풍에 황금벌판에 눈이 부셨다. 들판 곳곳에는 추수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빴다. 토요일 오후 도착한 집은 텅 비어있었다. 마루엔 흙 묻은 옷가지가, 마당에는 콩 타작을 하다 만 콩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집 청소를 대충 해놓고 들로 나갔다. 마침 타작을 끝내고 돌아오는 부모님을 도중에 만났다. 피곤이 역력한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반가움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미안하고 짠해지는 건 무슨 마음이었는지. 

   다음날 어머니가 챙겨주신 황금빛 가을 깻잎반찬을 들고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풍경이 하루 새에 달라질 것도 없었을 터인데 그 가을들녘은 왜 그렇게 서글프던지, 까닭모를 눈물은 왜 그리도 나던지. 그렇게 돌아온 날 상심한 내 마음 달래주려고 언니는 아껴둔 용돈을 헐어 어묵을 사왔다. 혼자 살 땐 흥건한 맹물에 김치만 넣어 먹었으면서 동생에게는 어묵 한 조각이라도 띄워주고 싶은 언니의 마음이었다.

   결국 그 자취방에 정들이며 살았다. 후미지고 불편했던 자취방에서 그런 언니가 있어서 살 수 있었다. 혼자였으면 이 겁쟁이가 의지 약한 내가 살아내기야 했을라. 철없는 이 동생을 끼고 사느라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까. 몸도 마음도 늦되어 늘 잔병치레 많았던 이 성가신 동생을. 

   비 오는 축축한 날이면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연탄 아끼려고 불문을 너무 닫았던 걸까. 새벽녘에 얼음장이 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아까운 번개탄에 다시 불을 붙여야 했던, 번개탄냄새 진동하던 그 자취방. 온기 올라오도록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 자취방.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던 마음 번개탄 불꽃처럼 다닥다닥 타오른다.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면 시큰대는 통증같이 그 냄새가 떠오른다. 빗속에는 나만 아는 그 냄새가 스며있다. 번개탄 냄새 연탄불 김치찌개냄새 쿰쿰한 그 자취방냄새, 열예닐곱 살 두 소녀의 꿈과 눈물을 두고 온 그 자취방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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