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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가벼워진다는 것

  


   가을이 뒹굴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 작은 바람에도 덩실대고 마른 풀잎은 서서히 몸 뉘일 준비를 한다. 알곡 털어낸 벼는 짚무더기로 돌돌 말릴 차례를 기다리며 누워있다. 올 한해 제 할 일 끝낸 것들의 가벼운 몸짓이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남김없이 열정을 태우는 또 다른 표현인 것 같다. 해마다 가을이면 알록달록 달아오른 자연의 빛깔은 그렇게 제 몫을 다한 하나의 아름다운 증거다. 말갛게 붉은 가을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순리의 빛이 저러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때 칙칙한 낯빛과 무기력한 증상을 상념에 젖은 것으로 애써 합리화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잠재된 열망을 마음껏 발산하지 못한 축적된 불만의 잔영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제대로 열정 한 번 태우지 못한 이십대는 익을 기회도 없이 지나갔다. 삼십대는 그 지난날에 대한 자책과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세월이 짓무르듯 곪고 말았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그냥 후회를 떨쳐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쉬운 청춘에 대한 미련은 결국 두 배의 시간과 그 몇 배의 열정을 쏟아 붓고서야 마른 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오랫동안 내 속을 들끓게 하던 숱한 생각들이 세월에 다듬어지고 걸러지면서 후회의 재가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그 못난 자취들은 하나씩 하나씩 고백형식의 글감으로 쏟아져 또 다른 꿈의 불쏘시개로 활활 타올랐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십대로 들어서던 때의 이야기다. 그때서야 진정으로 스스로의 열정에 불타는 희열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삶의 에너지 쏟아 부은 날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가뿐한 그 느낌을 참 오랜만에 느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붉은 단풍처럼 오롯이 나를 태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제 몫을 끝낸 하나의 해탈이다. 바람 한 자락에도 훌훌 날리는 낙엽처럼 나날이 나날이 덜어낼 일이다. 나날이 나날이 타오를 일이다. 먼 훗날 인생에게 세월 잘 태웠노라 말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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