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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오일장에 가면

      



   오일장은 삶의 바다다. 닷새마다 작고 낡은 배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여기저기 떠도는 풍문을 싣고 그리움처럼 그렇게 온다. 갖가지 사연들이 어우러져 그날 하루 장터의 닻을 올린다.

   오일장은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밀가루 반죽덩이를 즉석에서 썰어 파는 일명 칼국수할머니는 모퉁이 지정석 그 자리에 앉아있고 어묵 파는 젊은 부부도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건어물 장에는 메마른 그리움이 일렁거린다. 되 크기별로 수북이 쌓아둔 지리멸치는 아직도 은빛 물결을 기억하며 꿈틀대고 실타래처럼 엉킨 백진미 홍진미 옆에서 앙증맞은 꼴뚜기가 목마른 표정을 하고 있다. 건미역도 오징어도 비린내 나는 바닷가를 그리며 몸을 비튼다. 

   산골의 유년시절은 바다내음 나는 것들이 참 귀했다. 건어물 종류는 학교운동회나 소풍처럼 아주 특별한 날에나 구경할 수 있었던 고급반찬이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 나던 진미반찬 앞에서 침 삼키던 옛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학창시절은 지나갔지만 국물 흐르는 김치와 깻잎 반찬을 번갈아 담던 어머니 마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시장골목을 빙빙 돌아다니자면 눈이 즐거워진다. 올망졸망 줄을 선 난전이 한 편의 단막극들 같다. 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는 이도 있고 무념무상의 목석같은 이도 있다. 밀려오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해 그 복잡한 소란 속에서도 졸음에 빠진 이도 있다. 장날만큼은 그들 모두 각자의 무대에서 주연배우들이다. 무대음악은 트로트 카세트테이프를 팔며 풀빵을 굽는 풀빵아저씨가 담당한다. 오일마다 만나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어느 날 그 지정석에 보이지 않으면 은근 궁금하기도 하다가 다시 만나면 괜히 반가운 사람들이다. 

   오일장에는 낯익은 것들이 많아서 더욱 정감이 간다. 어머니 옷장에서 봄직한 알록달록한 일바지가 걸려있고 아버지가 좋아하실 법한 잠바도 눈에 띈다. 고향집 텃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은 절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감자 고추 상추 강낭콩, 팔순 고개를 훌쩍 넘기고도 호미를 벗 삼는 어머니의 긴 하루가 보인다. 이리저리 보던 재미는 사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가끔은 시장골목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별안간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보고픈 그 얼굴이 환영처럼 스칠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할아버지를 보면 진짜 상노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가신 아버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고작 빈 장바구니도 버거워하는 꼬부랑 할머니를 보면 곧 다가올 어머니의 미래가 그려진다. 풀빵아저씨의 서글픈 트로트는 나를 더 헤매게 한다. 

   또 아주 가끔은 낯선 시골장터에 헤매고 있는 내 삶이 식은 풀빵처럼 푸석하고 못났다는 생각에 괜스레 울적해지기도 한다. 그때 어디선가 두부 사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콩나물을 덤으로 파는 손두부집 그 할머니다. 불편한 몸으로 어머니를 거드는 아들의 손길이 바쁘다. 아직 더운 김이 오르는 두부 한 모에서 그네의 삶의 열기를 느낀다.

   오일장에 가면 삶을 보고 듣고 깨닫는다. 시장에 널린 한 소쿠리 한 소쿠리가 그날의 꿈이고 절실한 삶이다. 누군가 한 소쿠리의 꿈을 사고 누군가 어느 한 가장의 시름을 덜어 나눈다. 오고가는 발길 속에 인연이 흐르고 주고받는 눈길 속에 정이 맺힌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로에 대한 연민이 덤으로 돌고 돈다. 시장에는 생생한 삶의 순환이 있다. 

   파장 후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못 다한 이야기들이 나뒹군다. 언제나 유효한 무언의 약속이 다음을 기약한다. 오일장터에는 살아가는 소리, 삶의 냄새가 파도처럼 넘실댄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생의 메시지가 발길 따라 물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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