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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너른 마당은 온통 바람의 정거장이다. 매일 밤 바람이 스친 흔적은 마당으로 장독간으로 흩어진 낙엽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말해준다. 틈새 바람에 문풍지가 파르르 떤다. 사그락거리는 문풍지가 바람 속에 떨고 있는 우리네 인생 같다.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온몸으로 바람 속으로 가는 일이다. 사람과 사랑 그리고 떠나가는 그것은 하나같이 바람의 속성을 지녔다. 한 자락 바람처럼 왔다가 또 그렇게 가는 삶 속의 인연들은 가슴을 여미는 외풍을 남긴다. 처음 맞닥뜨린 아픈 외풍에 온 식구가 휘청댄다. 평생 억척같이 살아온 어머니지만 겁 많은 소녀가 되었다. 인생의 큰 바람에 휩쓸리고 나서야 아버지라는 존재가 막고 있던 삶 저변의 틈새바람이 보인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온 집안을 휘몰아치는 거센 외풍을 몰아왔다. 

   살을 에는 삭풍이었다. 처음 느끼는 한기에 뼛속까지 시렸다. 관심 밖이었던 낡은 창문 잠금장치를 단속하고 외풍의 통로를 샅샅이 점검했다. 창문마다 단열 에어캡을 부착하고 솜틀 문풍지로 꼼꼼히 막는다. 집에 있는 문이라곤 모조리 비닐을 씌워 바람의 통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삶의 한기는 막을 수 없었다. 

   서로의 온기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이 곁에 있어도 시린 것이 인생이다. 하물며 홀로 세상의 외풍에 맞서야하는 인생이랴. 바람 앞에 서는 법을 터득하기도 전에 가장이 된 장부 같은 여인들의 삶들이 다시 보인다. 동장군에 얼어붙은 생선보다 더 꽁꽁 언 몸을 하고도 시장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던 여인, 약초를 찾아 사계절 온 산을 누비고 장정처럼 지게로 거름을 져 나르던 여인, 여자의 삶은 모조리 바람 맞고도 어머니라는 또 하나의 거친 바람으로 살아온 그 인생들이 다시 보인다. 

   지금껏 바람에 맞서지 않고 떠밀리기만 한 나약한 나를 마주한다. 어머니의 바람막이가 되고 싶은 자식들의 번민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의 병마로 온 식구가 풍랑을 맞은 듯 휘청거린다. 아버지 그 한 몸으로 세상의 바람을 맞서고 어머니는 그 한 몸으로 팔남매의 바람을 잠재웠건만 고작 노구의 어머니를 받치고도 뿌리 뽑힌 나뭇가지마냥 흔들린다. 

   바람처럼 갔다 바람처럼 오는 문병에 어머니 마음 한 구석 스산한 외풍만 일으키는 것 같다. 병실에 계신 어머니를 떠나오던 날 얼굴을 때리던 그날의 바람은 내 속을 휘저었다. 링거 꽂은 마른 손으로 나를 보내던 그 모습에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바람을 따라 봇물처럼 밀려오는 서글픔과 덧없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부모라는 운명은 평생 자식들의 바람막이로 살다가 어두운 밤바람을 또 홀로 맞선다. 인생은 그야말로 통째로 바람맞는 일 같다. 

   사는 동안 여러 빛깔의 바람 앞에 선다. 샛바람을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간 시절 마파람이 몰고 온 비에 옴팡 젖기도 여러 번이었다. 느닷없이 불어 닥친 회오리에 바람의 통증도 여러 번 앓았다. 삶의 섭리는 어김없이 그리움과 회한을 실은 갈바람을 내게 보내왔다. 바람처럼 떠돌던 상념이 이제야 삶속에 맞닿는 것을 느낀다. 삶의 무게를 떠밀기도 하고 쓸어가기도 하는 그것, 바람이다. 

   바람결 따라 삶의 켜가 쌓인다. 바람 따라 떠내려만 가던 발길에 그 바람을 맞서는 힘 하나를 느낀다. 인생은 어차피 바람 속으로 걸어가는 여정이다. 바람이 전하는 삶의 노래 가슴으로 듣는 일이다. 어차피 누구나 바람 한 자락으로 떠나간다는 삶의 연민을 아는 일이다. 

   또 한 번 바람의 길에 선다. 바람에 헝클어진 인생 바람이 다시 개킨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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