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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염색

            


   자연의 섭리가 스미지 않는 데가 없다. 중년의 문턱에선 가을 서리 내리고 인생의 겨울에는 흰 눈이 내려앉는다. 어머니 머리밑이 하얗다. 이제 염색도 귀찮으시다는 노인이 되셨다.

   지금까지 어머니 염색을 직접 해드린 적이 고작 열 번 내외다. 뽀글뽀글 볶은 파마머리에 가르마를 타고 뿌리 부분부터 꼼꼼하게 약을 바르자면 실은 은근히 허리 아픈 일이었다. 하물며 삭신이 쑤시는 어머니로선 아버지 염색을 해드리는 것이 단연 고단했을 듯싶다. 

   아버지는 새치 한 가닥에도 거부감이 강하셨던 분이다. 세월이 내려앉을 틈도 없이 염색으로 철저하게 관리하신 터라 흰 머리카락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결국 그 수고로움은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 되었다. 더욱이 아버지는 숱조차 많았던 탓에 여간 품이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염색을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방바닥에 신문을 깔아두고 얌전한 아이처럼 앉아계신다. 그때쯤 어머니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한 마디 던지신다.

   “이 동네에서 자기처럼 염색 자주 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아요? 영감이 좀 영감다워야지!”

   너무 잦은 아버지의 염색이 사람 고생시킨다는 어머니의 투정이 일 리가 있었다. 시골영감다운 수더분함이 없다는 타박도 실은 수긍이 갔다. 물론 어머니는 이제 그 모든 것이 마음에 걸리신단다.

   집에 갔다가 마침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면 어머니 염색을 해드린다. 거울 속 홀로 앉은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다. 멋쟁이 영감 따라 덤으로 염색하던 때가 좋았다는 어머니의 서글픈 넋두리가 한숨처럼 깊다. 제일 신경 쓰이는 정수리 쪽이나 귀밑머리 쪽으로 염색을 거들어주시던 아버지가 세심한 손길이 그리우신 게다. 염색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낸 서로를 향한 보시행위였다. 

   지금 어머니에게는 흰 머리카락을 감추는 염색보다 조금은 특별한 염색이 필요하다. 가슴 속 새까만 그리움을 하얗게 지우는, 삶의 기운 되살리는 그런 거, 그런 염색약 있으면 참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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