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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오래된 사람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마음 가눌 데 없이 스산해지면 한 송이 수련처럼 떠오르는 얼굴 하나 있다. 언제 어느 때 생각해도 마음 한 구석 따뜻해지는 한 사람, 늘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함께 다닌 고향친구다. 

   고즈넉한 고택의 향기는 사람의 심성에도 그대로 젖어들었던가 싶다. 언니동생과 뒤엉켜 지내는 나와 달리 고풍스런 한옥에서 당시 시골에선 드물게 방 하나를 독차지하며 지낸 그녀는 오래된 방처럼 아늑하고 온화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가는 나를 그때마다 처음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소심한 내가 편하게 드나든 데는 늘 웃으며 반겨주신 그녀의 어머니 덕도 컸다. 뜰에 핀 능소화 같은 한결같은 미소에 난 그만 염치마저 잃어버린 걸까. 비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그녀가 집을 비운 때에도 내 방처럼 긴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세월과 더불어 삶의 공통분모는 점점 줄어들어도 그녀의 마음의 폭은 좁아지지 않았다. 타지로 고등학교를 가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집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고무줄 헐거운 추리닝바지처럼 허물없이 한 숨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의 정신적 피신처였다. 그녀에게만큼은 객지생활에 주눅 든 못난 모습과 열등감쯤은 들켜도 괜찮았다. 

   삶 속의 깨달음은 때로 너무 당연했던 그 무엇들 사이에 숨어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 내 공간을 언제든 오픈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음을 깨달았을 때 그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노라니 정작 지금은 마음 한 번 터놓을 기회도 흔치 않지만 가끔 똑같은 사투리로 이름 한 번만 불러주어도 좋다.

   지난 한식 때다. 부모님 산소에 다니러 온 그녀를 동네 어귀에서 우연히 만났다. 문득 그녀에게서 낯익은 얼굴이 떠올랐다. 여느 시골 아낙과 달리 한 떨기 백합같이 희고 고왔던 그녀의 어머니가 그대로 있었다. 영원히 사십대 얼굴로 남아있는 그 어머니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느덧 그녀와 내가 그 나이를 넘어서는 고개에 와있다. 내 이름 살갑게 불러주는 반가움 역력한 목소리는 언제나 열여섯 느낌 그대로다. 아껴두고 입는 유행을 타지 않는 옷과 같은 사람, 만날 때마다 역시 이 느낌이야 하는 그런 사람, 새삼 서로에게 오래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시큰해져왔다. 

   허겁지겁 이생 꾸려가느라 자주 보기 수월치 않지만 운 좋은 날 고향 길목에서 바람결에 봐도 괜찮다. 희한한 것이 오래된 사람은 막 떠나려는 차창 밖 스치는 얼굴로도 반가움이 그대로 묻어오니까, 먼 길 돌아온 풍문으로도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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