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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마당

   각본 없는 즉흥무대다. 사시사철 자연의 조화가 빚어내는 풍경이 허한 마당을 채운다. 하얀 눈에 젖어드는 촉촉한 달빛 정취가, 정처 없이 떠도는 헝클어진 낙엽이, 또록또록 떨어지는 처마 끝 빗방울이 그대로 생생한 한 막이다. 

   마당은 살아있는 화첩이다. 한 집에 인연을 두었던 삶의 자취들이 곳곳에 그림처럼 남아있다. 이제는 고목 티가 제법 나는 감나무가 마당에 그늘을 드리운다. 빗물에 질척해지는 땅을 피해 놓아둔 디딤돌은 아버지가 남기신 발자국이다. 차고 이지러지는 자연의 섭리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발자국은 어디까지가 어제이고 어디부터가 오늘일까. 인생은 마당이라는 공간에 한 점 시간으로 순환한다. 

   오래된 삶의 체취 올올이 스민 고향집마당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마당은 품이다.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텅 빈 충만이 지친 한 객을 어루만진다. 가끔은 바람 든 사람처럼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거닌다. 유년의 추억냄새 밴 마당의 공기가 온몸으로 속속들이 파고든다. 어느덧 도회지에서 따라온 번잡한 상념들이 쓸려나간다. 마음의 비질이 된다. 

   유년시절 소녀를 키운 것은 8할이 마당이다. 폴짝대는 송아지처럼 고무줄뛰기에 신명나게 튀어 올랐다. 땅에 대충 그림 하나 그려두면 목자놀이가 되고 그것도 시들하면 그늘에 앉아 공기놀이를 한다. 마당은 놀이의 장(場)이다. 모이를 쪼는 닭과 하릴없는 강아지도 종일 한 영역에서 노닌다. 그 틈에서도 잡초는 비집고 나오고 일개미 줄지어 다닌다. 한 공간 한 찰나에 같이 있으나 서로 걸리지 않는 공존의 교집합이다. 

   세월은 마당의 훈기를 조금씩 쓸어갔다. 뛰어놀던 소녀는 더 큰 마당을 찾아 떠나가고 집을 찾아오는 설렘 가득한 구두소리 갈수록 뜸해졌다. 시골집마당은 적적한 촌로의 삶처럼 허기로 가득 차있다. 행여 마당에 남아있을 아버지의 체취를 찾아 터벅터벅 걸어본다. 팔십 평생 아버지 발자국 숨결처럼 밴 마당이다. 무심한 자식들 기다리며 서성이던 이곳, 다시 일어서 걷고 싶어 하셨던 바로 그 마당이다. 

   언제부턴가 고향집마당은 인적 드문 산골 간이역을 닮아있었다. 마당에는 더디고 축 처진 어머니의 그림자 뿐, 무릎 저린 신음 소리뿐이다. 아무리 야문 비질로도 쓸어낼 수 없는 것은 어떤 적막이다. 나뭇가지를 흩어놓는 한 줄기 바람이, 온몸구르기에 바스락거리는 감나무잎이 반가운 인기척이다. 마당도 외로움을 아는 것 같다. 

   무거운 정적은 더 두터운 어둠을 끌고 왔다. 언제부턴가 마당이 부쩍 더 캄캄해진 것 같아 전구를 두 개나 더 설치했다. 어둠은 여전하다. 막막함도 그대로다. 안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마저도 마당에 괜한 쓸쓸함만 더한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의 헛기침만 못하고 발자국 소리만 못하다. 칠흑 같은 상실감에 짓눌린 마당은 맥없이 내려앉았다. 아버지 떠나신 후 마당이 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당에 깔린 상심은 볕을 다투는 시골일상의 생리에 잦아든다. 해마다 가을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단풍을 닮아 사각거리고 한 귀퉁이에서 대추가 꼬들꼬들 말라간다. 양철판 위 호두가 바람에 달그락거릴 때 볕에 달궈진 팥은 제 성에 못 이겨 톡톡 터진다. 봄날 고사리부터 추수철 벼까지 마당에서는 계절의 윤회가 펼쳐진다. 널어둔 콩이며 깨는 아들이고 딸이다. 마당의 빈자리를, 생의 허전함을 매우고 싶은 어머니의 독백 같은 애착이다. 

   해질 무렵이면 밤이슬을 피해 모두 거두어들인다. 오밀조밀 마당을 매우고 있던 농작물은 마치 헛것이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또 텅 빈 마당, 그 어떤 것도 가져갈 것 없는 생의 뒷모습이다. 때가 되면 누구나 떠나가는 삶의 이치다. 마당은 그대로 인생마당이다. 늘 그렇게 빈 것도 찬 것도 아닌 마당은 ‘지금 그리고 여기’가 있을 뿐이다. 

   우주의 마당을 본다. 하늘이 마당과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버지가 별빛으로 비추는 마당에서 그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별을 찾아 헤맨다. 별은 이 마당에서 시간의 저편으로 옮겨간 그리운 이들의 발자국이다. 뚜벅 뚜벅 다시 걸어 들어올 것 같아서 하염없이 서성였다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느낀다. 반짝거리는 별빛이 글썽글썽 맺힌 얼어버린 눈물방울 같다. 마당은 지나간 인생들의 여운과 그리움으로 한 길씩 깊어간다. 

    아침저녁 피고 지는 꽃도 이듬해를 기약한다. 이생에 다하지 못한 인연은 새로운 인생마당을 따라 돌고 돈다. 아버지 떠나간 마당에도 제 차례 기다리던 우주의 별 하나가 용케 찾아왔다. 꽃잎만한 발자국 내딛고 싶어 안달인 아이의 모습이 생기 넘치는 한 막이다. 손자재롱에 되찾은 어머니의 웃음이 마당의 적막을 깨운다. 아이의 발자국에 또 하나의 마당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시 새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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