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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골목길 쉼돌에 앉아



   해질녘 노을은 골목길 쉼돌에도 내려앉는다.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골목길에 바람이 홀로 붉다. 숱한 인연들이 머물다 간 쉼돌에 이방인처럼 몰래 앉아본다. 여기 나처럼 있었던 그리운 인생들의 그림자가 꾸물꾸물 서산을 넘어간다. 

   흙먼지 날리던 삼거리 골목길은 반들반들한 시멘포장에 가로등까지 끼고 훤해졌는데 유독 쉼돌에 앉은 사람만 늙었다. 수십 년 전부터 할매로 불리던 신촌댁 할매는 아흔을 바라보는 진짜 할머니가 되었고 자욱한 담배연기를 몰고 다니는 진이할매는 여전히 골목의 전설처럼 앉아있다. 항상 젊은 아낙인 줄 알았던 문산댁 아주머니도 은근히 노인 티가 물씬 난다. 쉼돌 노을 속에 인생도 저물고 있었다. 

   골목길 쉼돌은 간이역이다. 말벗 그리운 촌로들 하릴없이 나와 앉아 지나가는 걸음마다에 말을 건네며 적적함을 달랜다. 긴긴 해가 무료하여 밭일 나가던 꼬부랑할머니 사람 소리 반가워 엉금엉금 찾아든다. 삼거리 골목길에 놓인 네댓 개의 쉼돌은 앉는 이가 주인이긴 하지만 전과 달리 여풍(女風)이 거세졌다. 바깥세상 바람이 여기까지 불어왔나 했더니 걸걸한 기침소리 하나 둘 사라진 때문이었다. 

   골목길 쉼돌은 한여름 밤 길 위의 사랑방이 된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쑥더미에 모깃불 피워두면 어느 새 눈 매운 연기 같은 근심보따리 하나씩 풀어놓는다. 철없는 자식일로 한숨짓는 아낙에게 익어가는 곡식을 기다리듯 그리 마음먹으라 한다. 속 썩이는 영감 탓에 신세한탄이 늘어지니 여름 한철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거라고 다독거린다. 쉼돌 사랑방에서는 별빛 같은 삶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간밤의 일을 매일매일 이별하는 쉼돌에는 마중의 설렘과 보내는 서운함이 켜켜이 쌓여있다. 아버지는 자식 온다는 기별에 일찌감치 나와 서성이며 쉼돌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열댓 번, 또 가는 날이면 마을 어귀를 벗어나도록 꼼짝 않고 쉼돌처럼 오래도록 앉아계시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버지는 하나의 쉼돌이었던 것 같다. 오며가며 쉬어가는 쉼돌처럼 인생의 거리에서 헤매고 다니는 자식들 한숨 쉬어갈 수 있도록 늘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던 기다림의 삶이었다. 

   집에 가는 길 삼거리 골목을 지날 때마다 본능처럼 쉼돌에 눈길이 간다. 가끔은 바람난 사람처럼 인적 드문 시각에 나와 몰래 앉아본다. 가로등불빛이 끌어안은 쉼돌은 작은 독무대가 된다. 밤하늘엔 별들이 쉼돌처럼 떠있다. 오래전 아버지 홀로 앉아 별처럼 저 멀리 떠나가 있는 자식들을 그리워했을까. 

   고향집 가는 날이면 골목길 그 쉼돌에 나가봐야겠다. 행여 아버지 밤하늘의 쉼돌에서 기다리고 계실지, 못 다한 이야기 혹 별똥별처럼 내 가슴으로 떨어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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