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배경 1983년도 경상도 마전리 뱀골마을.
마전은 글자 그대로 삼밭이다.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되어 있어 바람세가 적고,
땅이 기름져 예부터 삼을 많이 심어 주 생업으로 했으므로 마전이라 이름하였다.
뱀골마을 어귀, 낡은 가로등 아래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봉숙이, 손에 통지표를 들고 나타나 남학생 옆에 앉으며 투덜거린다.
봉숙 아~ 진짜 미치겠네…… 이거를 우째 보여 주노…….
수철 와? 무슨 일 있나? 와 카는데?
봉숙 이기 다 오빠야 니 때문이다. 니 연애편지 써 준다꼬 공부를 모했다 아이가.
수철 지랄한다. 그기 와 내 때문이고.
공부는 평소에 해야 되는기제 벼락치기로
몰아 한다꼬 그기 되나?
봉숙 벼락이고 천둥이고 아부지한테 내가 벼락 맞게 생깄다.
수철 너거 아부지가 그래 무섭나?
봉숙 몰라. 내 쫓기나믄 오빠야가 책임져라.
수철 가시나. 내가 와 니를 책임지노.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봉숙 요~ 봐라 봐라……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 다르다 카디 인제 편지 안 써 줘도 된다 이 말이제.
수철 안 써 줘도 된다.
봉숙 (당황해하며) 안 써 줘도? 그 언니야가 만나 준다 카드나…… 얘기 좀 해 봐라.
반은 내공이다 아이가.
수철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송이.
봉숙 그기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시고, 오빠야가 적었을 리는 없고 또 누고?
발로 써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수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니가 한다. 무식하기는. 〈꽃밭에서〉 정훈희 모르나?
봉숙 꽃밭에서 우예 됐는데?
수철 부산의 가수 정훈희…… (얼버무리며) 말을 말자. 됐고, 니 통지표 걱정이나 해라.
봉숙 아 통지표. 미치겠네. 아…… 있어 봐라.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서 성적을 고친다)
수철 야가~ 어데서 못된 짓만 배워가.
봉숙 아부지 시력이 나쁘다 아이가. 뭐 어른을
속이는 기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아부지 심정
상하게 하는 거보다 기분 좋게 맹글어 드리는 기
효도라 그 말이제.
수철 둘러치기는. 고마 들어가라. 가서 아부지
한테 아양도 좀 떨고…… 나는 공사가 다망하시가
이만 퇴청해야 쓰겠다. (일어선다)
봉숙 오빠야! 잠깐만 있어 봐라!
수철 바쁘다 카이. 와?
봉숙 다음 주 오빠야 생일이제. 누구누구 초대할 껀데? 초대장 돌릴 꺼면 내가 만들어 주고.
수철 일단 니는 없다.
봉숙 뭔 소리고? 우리가 언제 불러야 가는
사이가. 부르기도 전에 가가 음식도 날라 주고
자리도 세팅해 주고. ‘척’이면 ‘착!’ ‘착’이면 ‘척!’
수철 (앉으며) 니 함부래 올 생각하지 마라!
왔다카모 오빠고 동생이고 다시는 안 볼 줄 알아라!
봉숙 그 카이까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겠다.
수철 니 아랑드롱 나오는 영화 책받침 갖고 싶다 캤제. 구해 주께.
봉숙 〈태양은 가득히〉.
수철 있다.
봉숙 〈조로〉.
수철 빙고!
봉숙 〈시실리안〉.
수철 와우!
봉숙 이소룡 〈용쟁호투〉.
수철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고. 아랑드롱에서 와 갑자기 이소룡이 등장하노.
봉숙 취향이 바낐다.
수철 카지 말고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주께. 탕수육에 짬뽕 곱빼기 쏜다.
봉숙 팔보채에 간짜장 곱빼기!
수철 (손을 들어 올리며) 칵! 마~.
봉숙 눈을 치켜뜬다.
수철 단무지도 곱빼기로 시키 주께.
봉숙 짬뽕 곱빼기 추가.
수철 (고분고분) 그래~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나?
봉숙 만두 서비스에 음료는 콜라 하나, 사이다 하나.
수철 음…….
봉숙 (가방을 챙겨 일어서며) 생일날 못 볼 거
같으이까네. 미리 생일 축하하께.
(돌아서서 갑자기 볼에다 뽀뽀를 하고 도망간다)
수철 (놀라서 당황해하며) 야! 저기~…… 저 생쥐만 한 기…….
뽀뽀한 볼을 살짝 만져 보며 히죽거린다.
무대 어두워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