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 Sep 19. 2023

나의 뽀빠이

이젠 내가 뽀빠이

뽀빠이 살려줘요!!

올리브가 큰 소리로 뽀빠이를 부르면 시금치 캔을 따서 우걱우걱 먹고는 팔의 알통을 자랑하며 장소 불문하고 불쑥 나타나 올리브를 도와준다.     

1997년 3월 LG 디스플레이 특별채용 면접이 있던 날, 함께 면접을 보기로 한 친구는 김천에서 오고 있었고, 나는 마침 회사가 멀지 않아서 엄마가 데려다주셨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면 차의 이동과 지나던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했었다. 난 다행히 면접 시간에 맞추어 도착해 면접을 보고 4월 운 좋게 입사를 할 수 있었다.

그 건물 3층은 설계실이다. 3층 창가에서, 큰 키에 당고머리를 하고 허둥지둥 면접장으로 달려가는 내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신입사원 시절 날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던,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항상 웃는 얼굴에 긍정적이었던 작은 거인 나의 뽀빠이     

 당시 난 기구설계 연구원으로, 그는 회로설계 주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신규사업부라 하나의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이것저것 이름을 붙여 술자리도 잦았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들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 당시 홍일점이었던 나는 어느 곳을 가든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날 불러주는 곳도 많아 일주일이면 7일은 술을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러고 집에 올 때면 늘 그 사람은 우리 집 앞에서 나의 귀가를 확인하고서야 기숙사로 향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이제 술 좀 그만 마시고 자기와 함께 결혼하자고 나만 있으면 뭐든 자신 있다며 꼭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며 꽃다발 하나 내밀며 청혼을 했다. 그것도 둘이 만난 첫날 저녁을 먹으면서 말이다. 근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1년의 비밀 사내 연애를 하고 다음 해 벚꽃 흩날리는 봄날 결혼했다. 8살이라는 나이 차이 그에게는 내가 마냥 철부지 어린아이 같아 보였던 거 같다.      

 그렇게 우린 주위의 관심과 시샘을 한껏 받으며 사내 부부 1호 그리고 출산휴가를 처음으로 받은 여사원으로 기록되었고 둘째 출산 후에도 가깝게 계신 친정엄마 덕분에 회사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밤잠 많은 나를 대신해 밤 수유를 책임져 주던 다정한 남편, 여행 가고 싶다고 목적지를 대면 꼼꼼한 A형답게 맛집과 볼거리를 찾아 계획 세워 데려다주는 다정한 남자, 6 시그마가 도입되었을 때 열심히 공부해서 MBB(Master Black Blat)가 되고 말솜씨가 좋아 사내 강사를 하면서 자기 역량을 십 분 발휘했던, 3D 개발팀장을 맡아 LG그룹 전체에서 연구개발 대상을 받은 일 잘하는 사람.

내가 즐겁게 일하며 지내도록 물고기자리를 만들어 준 것도 남편의 그림이었다. 방사선 치료로 평행장애가 오면서 운전이 어렵게 되자 본인의 차를 정리해서 벤츠를 사주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픈 남편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에게 뽀빠이는 무엇이든 묻기만 하면 대답이 척척 나오고 걱정거리가 있으면 똑소리 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다.

면접 보러 온 날 첫눈에 나에게 반해버린 뽀빠이는 언제고 나의 부름에 쏜살같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젠 내가 뽀빠이가 되어 줄 차례다.

폐암 4기 암 환자인 그에게 내가 원하는 유일한 한 가지. 우리 곁에서 더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하는 일이다.     

그동안 애썼어. 고마워.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