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이른 아침 눈을 떠 물 한 잔 들이켜고 필사책을 편다. 끄적이고 기록하며 내 몸을 살살 깨운다. 필사를 시작한 지 165일째, 누군가의 글을 제대로 곱씹으며 생각하는 이 시간이 좋다. 요즘은 나태주 시인의 <너처럼 예쁜 동시>를 필사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윈디언니의 애정 어린 댓글까지 확인하고 나면 모닝 루틴 완료! 매일 반복하는 작은 일상을 행복으로 바꾸는 언니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힘차게 연다. 6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다.
나보다 5살 위인 윈디언니는 3년 전에 만났다. 통통한 몸매에 프릴 원피스를 입고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하던 초여름이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발목 인대가 늘어나 깁스하고 있던 나를 보며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더운데 발목에 깁스하고 불편해서 어떡한대….”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하고 거리낌 없이 다가서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DM으로 날아오는 그녀의 메시지,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한 눈웃음이 선하다.
일찍 시작하는 아침, 함께 평화누리공원 갈까요?
오우 좋은 생각!! 집 앞에서 만나요.
윈디언니 덕분에 새벽 산책이 거창해진다.
자유로 문산 방향으로 차를 이끈다. 평일 새벽의 자유로는 아우토반처럼 거침없이 길을 내준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 자유로가 이름값 제대로 한다.
이 시간 평화누리공원의 산책은 평화롭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 평화롭게 잔잔히 흐르는 임진강을 따라 펼쳐진 높고 낮은 산, 논과 밭에는 파릇파릇 녹색 오곡이 자라고 있다. 우리는 평화누리 바람의 언덕으로 향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연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에게도 아픔이 있다.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걷지 못할 수 있다는 진단받았다고 했다. 지금은 열심히 재활한 덕분에 생활하는데 문제없을 정도로 잘 걷는다. 장시간 서 있거나 오래 걸으면 힘들어한다지만, 매일 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그녀의 딸은 빠띠쉐가 꿈이다. 사고 전까지는 치과 간호사로 일했지만 사고 이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며 제과 학교에 입학했다. 사수를 쫓아 이곳 파주까지 들어와 독립했는데, 윈디언니는 딸의 재활을 돕기 위해 함께하는 중이다.
평화누리공원에는 3천 개의 바람개비와 대나무 옷을 입고 북녘을 향하는 최병곤 작가 <통일 부르기>라는 작품이 있다. 윈디언니는 이 작품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나 혼자 키다리 아저씨 만나고 왔어.”
나 요즘 좀 힘들었어,라는 고백처럼 들린다. 나도 언니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이 작품 앞에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산책 친구가 되어 찾은 소중한 장소다.
3만 평 대형 잔디 언덕이 우리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는 시간. 뛰고 싶을 때 뛰고, 걷고 싶을 때 걷고, 아무 생각 없이 벤치에 앉아 멍 때리면 어떠하랴. 그날 그때 내 맘을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다. 걷다 뛰다 멈추었다 실컷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른 바다가 함께 겹치는 파란 하늘 그곳이 주는 위로에 안녕, 인사하고 차에 오른다.
초록 논밭과 바다를 품은 하늘빛으로 충전한 나의 몸과 마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오늘 하루도 거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