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첫날, 잠시 멈춰도 좋은 이유
“계획은 지도일 뿐, 진짜 여행은 길 위에서 시작된다.”
마이클 폴란 (Michael Pollan)
[상세 구간]
오포르투(Oporto) – 라브루주(Labruge) – 마토지뉴스(Matosinhos) – 빌라 샹(Vila Chã) – 빌라두콘드(Vila do Conde) 33.2km
내 일정도 딱 그랬다. 길 위에 있는 지도는 과감히 접어두었다. 순례길 첫날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마법 같은 도시 포르투(Porto)에게 마음을 맡겼다. 돌바닥을 타박타박 걷다 보니 풍경은 중세와 마법의 세계 사이 어디쯤 도착했다. 오늘 하루는 지도에 찍은 점보다 훨씬 입체적인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처럼 포르투라는 도시를 만날 생각에 설레며 시작했다.
렐루 서점 (Livraria Lello) – 마법이 머무는 곳
시간여행 하듯 골목을 걷다 영화 세트장처럼 서 있는 한 서점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곳은 1906년부터 100년 넘게 책과 사람을 맞이해 온 포르투의 상징 렐루서점이다.
출국 한 달 전쯤 인터넷으로 아침 9시 첫 입장 티켓을 예약해 두었다. 여유를 두고 8시에 도착했는데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직원이 다가와 배낭을 맡기라고 했다.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 순간 몸이 가벼워져서였는지, 마음이 들떠서였는지 눈이 번쩍 떠졌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면 모두가 잠시 말을 잃는다. 천장에 박힌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은 바닥에 무늬를 새기듯 퍼지고, 곡선으로 흐르는 붉은 계단은 한 권의 동화책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사방 벽면을 빼곡히 채운 오래된 나무 책장에서는 책과 시간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 나왔다.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계단 앞은 전쟁터였다. 찰칵찰칵 쉴 틈 없는 셔터소리, ‘좀 비켜주세요’라는 눈빛과 완벽한 포즈를 위해 몇 번씩 자리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책 보다 인생샷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나 역시 사람들의 어깨를 헤치며 사진을 남겼다. 고요한 듯 복작한 렐루서점은 책을 보러 왔다기보다 사진 찍기 위해 온 사람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드니 스테인드 글라스 천장 한가운데 라틴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Decus in Labore.” (노력 속에 명예가 있다.)
짧지만 묵직한 문장은 렐루 서점이 걸어온 1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나무를 깎아 책장을 세우고 한 권 한 권 책을 꽂으며 보내온 시간들, 책방의 품격은 노동과 정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화려한 외관 뒤에 감춰진 진짜 가치는 세월을 견딘 성실함에 있음을 말이다.
이곳이 마법 학교처럼 느껴진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J.K. 롤링이 포르투에 머물던 시절 자주 들렀던 곳으로, 호그와트의 도서관과 계단은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마법의 시작을 꿈꾸게 되는 공간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내게도 특별하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 첫 번째 책을 읽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영화로 이어지며 전 세계가 마법의 열풍에 휩싸일 때, 나 역시 함께 웃고 울었다. 내 기억 속 마법 세계와 현실이 맞닿은 꿈결 같은 장소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속삭임이 피어올랐다.
“나도 마법을 걸어야지. 설렘은 발끝에, 용기는 가슴에 담고, 이 길을 즐겁게 걷자.”
클레리구스 탑 (Torre dos Clérigos) – 숨은 차고, 뷰는 터진다
도시 한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탑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클레리구스 탑 (Torre dos Clérigos)이다.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존니 (Nicolau Nasoni)가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한 탑은 도시의 중심에서 묵묵히 세월을 지켜온 포르투의 랜드마크다. 높이 75미터로 꼭대기까지 240개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었다.
돌계단 하나하나 디디며 차오르는 숨을 돌에 새겨진 세월과 맞바꾸듯 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과 뻐근해 오는 종아리가 터질듯했지만, 돌 틈새로 스미는 바람이 등을 밀어주는 듯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꼭대기에 닿았다.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포르투의 풍경이 눈을 가득 채웠다. 숨 고르기를 하며 벅찬 마음으로 포루투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닥다닥 붙은 주황색 지붕들 사이로 도우강이 흐르고, 저 멀리 대서양(Atlântico)까지 닿은 시선에 마음을 열었다.
순례길을 앞두고 선물처럼 받은 풍경이 고마웠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발걸음에 먼저 다가와 나를 응원해 주는 도시에 마음을 빼앗겼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은 자상했고, 탑 아래 작디작은 도시의 숨결은 바쁘게 지내온 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해가 질 무렵 도시는 어떤 빛으로 물들지 상상만으로 황홀해졌다. 도시와의 만남이 이렇게 벅차고 아름다울 줄이야. 고마워 포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