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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과 함께 걷는 시간

두려움은 밀어내고 용기를 내어 건너는 길

by 올리브

“여행이 우리를 만드는 법, 걷는 동안 우리는 변한다.”

J.R.R. 톨킨


[상세구간]

빌라 두 콘드(Vila do Conde) → 포보아 드 바르징(Póvoa de Varzim) → 아풀리아(Apúlia) → 파웅(Fão) → 에스포젠드(Esposende)

거리 23km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스페인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 지방,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다.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출발하는 은의 길(Vía de la Plata), 바스크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길(Camino del Norte), 포르투갈 내륙을 지나는 중앙길(Camino Portugués Central), 그리고 대서양을 곁에 두고 걷는 포르투갈 해안길(Camino Portugués da Costa)이 대표적이다.

올여름 내가 선택한 길은 포르투갈 해안길이다. 리스본(Lisboa)에서 시작해 포르투(Porto), 북부 해안을 따라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리스본에서 산티아고까지는 약 600km. 완주하려면 적어도 25~30일 이상이 필요하다.
순례자들이 포르투를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는 분명했다. 적당한 거리와 기간(약 240km, 10~12일), 편리한 교통, 잘 갖춰진 순례자 인프라, 걷기 전 하루 동안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매력까지 더했다.

나 역시 포르투에서 하루 머물며 도시를 둘러보고, 지하철을 타고 빌라 두 콘드(Vila do Conde)까지 이동해 본격적인 순례를 시작했다. 열흘 동안 대서양을 따라 걸으며, 갈리시아 해안을 지나 영적의 길(Variante Espiritual)로 산티아고에 도착할 계획이다.


바닷바람과 함께 걷는 시간


여름의 아침은 바다를 닮는다. 차갑고 투명하다가도, 어느 순간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그날기온은 17도에서 최고 24도, 걷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멀리 산타 클라라 수도원(Mosteiro de Santa Clara)의 첨탑 위로 햇살이 천천히 내려앉을 때쯤 발걸음을 내디뎠다. 물빛은 잿빛에서 연한 푸른빛으로 바뀌며, 순례자의 길이 실감 나지 않던 어제와 달리 걷는 순간이 고요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아베 강(Rio Ave) 옆 앉아있는 청동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렌딜헤이라(Rendilheiras)는 레이스 공예를 이어온 여성들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바닷바람과 소금기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그녀들의 손끝에는 가족을 지키려는 의지와 자부심이 스며 있었다. 여인을 바라보며 나의 평범한 일상과 겹쳐졌다. 물고기자리를 운영하고, 남편을 돌보며, 집과 일을 오가며 쌓아가는 소소한 의미들, 단골이 조금씩 늘어나는 즐거움과 남편이 괜찮다고 말해줄 때 드는 안도감이 바늘 끝 한 땀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강 하구를 지나 바닷가 위에 서있는 성 요한 세례자 요새(Forte de São João Baptista)가 보였다. 1640년대 포르투갈이 스페인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적과 적군을 막으려 세운 요새다. 두꺼운 성벽은 세월과 바닷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포보아 드 바르징(Foz do Varzim)의 해안 산책로에는 파란색과 흰색 타일로 꾸며진 아쥴레쥬가 길게 이어졌다. 어부들의 일상, 바다 풍경, 마을의 모습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각처럼 펼쳐졌다.

보드워크 위로 나의 발걸음과 함께 러너들의 리듬이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갈매기의 울음과 파도 소리가 배경이 되었다. 젊은이들의 가벼운 발걸음도 있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는 한 노인이었다. 흰머리에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몸, 선글라스와 헤드셋까지 갖추고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달리고 있었다. 얼굴과 몸에서는 오래 달려온 사람만이 가진 여유와 강인함이 묻어났다. 정오가 가까워지며 기온은 올랐지만, 부드러운 해풍이 더위를 밀어냈다.

아풀리아(Apúlia)의 좁은 골목을 지나 성 미구엘 성당(Igreja de São Miguel) 앞에 섰다. 두 개의 총탑이 하늘을 향해 조용히 서 있고, 바람과 햇살에 닳은 벽면은 세월의 흔적을 부드럽게 드러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세요를 찍고, 언제나 그렇듯 가족들의 건강과 순례길을 걷는 동안 안전하게 걸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성당을 나와 근처 바에 들러 민트가 가득 담긴 모히또 한잔과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잔 속 민트 향이 청량하게 코끝에 닿아 하루 종일 느낀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파웅(Fão)에서 카발루 강(Rio Cávado) 위에 놓인 다리를 마주했다. 좁은 다리 위로 차들은 일방통행으로 오갔다. 발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니 심장이 쿵쾅 뛰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 눈앞의 다리는 마음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양옆 보행자 길 난간을 바라보니 가슴이 조여 왔다. 한참을 망설이다 차도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발씩 내디뎠다. 눈은 바닥에 고정하고 느린 걸음을 재촉하니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보행도를 두고 차도를 걷는 나를 본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리고 손짓했다. 속으로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며 떨리는 발걸음을 이어갔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다리 끝에 닿으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두려움 속에서 한 발 내딛는 용기, 떨리는 심장을 달래며 길 위에서 조금씩 극복하는 나의 모습이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에스포젠드(Esposende)에 가까워지자 하늘빛이 붉게 물들었다. 바다 위로 드리운 석양이 파도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날아드는 갈매기 날개도 붉게 물들였다. 하루 종일 바람과 파도를 벗 삼아 걸어온 발걸음이 노을 앞에서 조용히 멈추었다. 붉음과 푸르름이 뒤섞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의 피로를 녹였다.


카발루 강 위에 놓인 다리는 나에게 큰 두려움이었지만, 작은 용기로 특별한 하루가 만들어졌다.

두려움과 마주한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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