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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앞에서 멈추는 법

바닷가 아침 빛에서 에펠의 다리까지 이어진 하루

by 올리브

“두려움은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길을 찾게 한다.”

프랑시스 베이컨


[상세구간]

에스포젠드(Esposende) → 마리냐스(Marinhas) → 안타스(Antas) → 카스텔루 두 네이바(Castelo do Neiva) → 다르크(Darque) → 비아나 두 카스텔루(Viana do Castelo)

거리 약 28km


바다는 짙은 푸른빛과 은빛 물결을 머금고 부드러운 아침과 어우러져 생기 있는 빛을 흘려보냈다. 에스포젠드를 벗어나자 작은 어촌 마을 마리냐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붉은 지붕들이 햇살에 반짝였고 돌담 위로 소담스럽게 흘러내린 하얀 메꽃이 발걸음을 맞이하듯 곱게 피어 있었다. 아침 온기가 마을을 감싸며 하루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성 미카엘 대천사 교회(Igreja de São Miguel)가 묵묵히 서 있었다. 대천사 미카엘은 악을 무찌르고 약한 이를 보호하는 수호자로, 오랜 세월 어부와 농부들의 삶을 지켜주는 상징이다. 수 세기 동안 마리냐스 사람들은 험난한 바다의 파도와 고된 생업 속에서 대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냈으리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은 세월의 풍파를 품은 듯 차분했고,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종탑은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단정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마리냐스’라는 이름은 ‘바다와 가까운 땅’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름처럼 성당 역시 바다의 숨결을 닮아 굳건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성당 문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기도했다. 자리에 앉아 성당 안을 둘러보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과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어린 미소와 불룩 나온 배, 다정한 눈빛이 어쩐지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쟁이를 떠올리게 했다. 순례자 여권을 내밀자 신부님은 작은 서랍에서 인장을 꺼내어 정성스럽게 실링 인장을 찍어주셨다. 선명한 자국은 내가 걸어온 발걸음을 증명하는 표식이다. 건네받은 여권을 보니 이곳을 지나쳐간 수많은 순례자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벨리뉴(Belinho)와 안타스(Antas)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길을 걷다 보니 뜻밖의 수수께끼가 나타났다.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낯선 색이 끼어들었다. 노랑 아래 빨강 줄무늬가 나란히 그려진 표식이 나타났다.

장난 삼아 칠해놓은 페인트 같아 보이지만 길의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노란 화살표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을 뜻한다. 아래 줄무늬 노랑과 빨강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즐겨 걷는 소규모 하이킹 코스 PR(Pequena Rota)을 알려주는 표식이고, 빨강과 흰색은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하이킹 코스 GR(Grande Rota)의 표식이다.

노란 화살표와 두 색이 함께 그려진 자리는 서로 다른 길이 겹쳐지는 자리였다. 순례자의 길, 여행자의 길,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생활 길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그렇게 작은 표식 하나로 모두를 묶어주는 듯했다.



또 다른 표식을 만났다. 벽면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와 파란 화살표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노랑은 북쪽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고, 파랑은 남쪽의 파티마(Fátima)로 향한다. 파티마(Fátima)는 루르드(Lourdes, 프랑스), 과달루페(Guadalupe, 멕시코)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로 꼽힌다. 1917년 세 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여섯 차례 발현한 곳으로, 지금은 대규모 성지가 세워져 매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모인다.

길 위에서 만난 두 개의 화살표는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묘하게 닮아있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길은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노랑과 빨강, 노랑과 파랑은 단순한 색의 조합 같지만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과 기도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화살표 하나, 줄무늬 하나가 길 위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순례자의 발걸음과 여행자의 마음이 겹쳐지며 화살표와 줄무늬가 길 위의 숨은 안내자가 되었다.



카스텔루 두 네이바(Castelo do Neiva) 마을로 들어서자, 오래된 석조 건물이 언덕 위에 고요하게 자리했다. 862년에 축성된 성 야고보 교회(Igreja de Santiago)는 스페인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산티아고 헌정 교회였다. 성당 입구에는 산티아고의 모습도 보였다. 천 년을 훌쩍 넘어 이어진 세월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종탑 아래 서니, 시간이 흘러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 세월의 무게를 더 깊게 전하는듯했다. 성당 안은 소박했지만 순례자들의 발자취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세요를 찍을 수 있는 도장이 놓여 있고, 이곳까지 잘 걸어왔다고 말해주듯 기도의 자리가 있었다. 낯선 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며 같은 마음을 남기고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사실이 묘한 위로로 다가왔다.



작은 마을과 농가가 어우러진 풍경이 이어지며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는 시간이었다. 낮게 깔린 지붕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지친 발걸음을 밀어주듯 스쳐 갔다. 모든 것이 꾸밈없는 하루였고, 나의 발걸음은 비아나 두 카스텔루에 이르러 다시 강 앞에 섰다.

리마 강 위로 웅장하게 펼쳐진 철교, 폰치 에펠(Ponte Eiffel) 다리가 길게 펼쳐졌다. 파리의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이 남긴 다리는 육중한 철골이 하늘빛과 강물 빛을 동시에 품으며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웅장함보다 두려움이 먼저 다가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막혀왔고 발끝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바에 앉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눈앞에 놓인 다리를 어떻게 건너면 좋을지 생각했다. 평소라면 맥주를 주문했을 텐데 긴장한 탓에 당 충전이 필요했다. 환타 한 캔과 점심을 시켰다. 캔을 따 얼음 잔에 따라 쭈욱 들이켰다. 아니 이 음료가 이렇게 맛있었나 싶은 놀라움에 눈이 번쩍 떠졌다. 과즙의 산뜻한 향, 입안을 감싸는 상큼한 산미와 깔끔한 뒷맛까지 한국에서 익히 알던 맛과 전혀 다른 시원함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료에 세금을 부과하는 설탕세(Sugar Tax)를 시행한다. 건강을 중시하는 규제와 소비자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제조사는 설탕 함량을 줄이고 과즙과 천연 감미료를 사용해 음료를 가볍고 상쾌하게 만들었다. 갈증과 긴장을 달래기 위해 시켰던 음료 한 잔이 뜻밖의 행복이 되어 다가왔다. 같은 이름의 음료가 이렇게 맛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아마도 이 길을 걸으며 나의 최애 음료가 될 것 같았다.


잠시 잊었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리를 건너기 위해 바 주인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내 두 다리로 온전히 건너지 못하지만, 두려움 앞에서 멈추고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용기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넜다. 걷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마주하고, 멈춤마저 걸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오늘 길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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