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벼움이 준 선물

배낭을 내려놓고 대서양을 따라 걷는 길

by 올리브

“걷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윌리엄 헤이그


[상세구간]

아 구아르다(A Guarda) → 오이아(Oia) → 비다이아(Viladesuso) → 뻬드라 루비아(Pedra Rubia) → 바요나(Baiona)

거리 약 32km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신호였다. 이제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배낭 운송 서비스를 신청했다. 순례길에는 ‘모칠라 트란스포르트(Mochila Transport)’라 불리는 배낭 운송 서비스가 있다. 현지에서는 농담처럼 ‘동키(el burro)’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 순례자들의 짐을 나르던 당나귀처럼, 이제는 작은 밴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아침에 숙소 앞에 배낭을 두고 나서면, 작은 밴이 배낭을 실어 다음 숙소까지 옮겨준다. 덕분에 손에는 스틱, 어깨에는 가벼운 배낭 하나만 메고 길을 걸으면 된다. 무게에 짓눌리던 허리가 한결 가벼워지고, 눈길은 더 자유롭게 하늘과 들판을 향한다. 배낭을 보내버린다는 건 짐을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짐까지 함께 내려놓는 듯한 해방감을 안겨준다.

접수를 마치고 나서야 땀에 젖은 옷들을 세탁하고 샤워를 했다. 허기와 피로가 겹쳐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들떠 있었다. 작은 항구 도시 아 구아르다의 저녁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노을이 황홀했다. 대서양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은 태양이 바다를 붉은 금빛으로 물들이고, 파도 위 부서진 빛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음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았다. 걸음마다 쌓였던 고단함이 물결에 녹아내리듯 사라지자, 마음이 편안해지며 엄마 생각이 났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 수고했다는 말 대신 차려주시던 소박한 저녁 밥상...

그리운 마음 담아 엄마에게 노을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남겼다. 눈가가 촉촉해지려던 순간 꼬르륵 배고픈 소리가 들려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젤라또 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진열장에 놓인 맛들을 보며 우물쭈물하자, 눈치를 살피던 여주인은 작은 스푼에 젤라또를 떠 건네며 윙크를 날렸다. 그녀의 유쾌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반한 건 맛이었는지, 그녀의 유쾌한 한 수에 녹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한 스푼의 달콤함과 미소를 받아 들고 바닷가로 나왔다. 손에 쥔 젤라또가 쫀득쫀득 맛있기도 했지만, 그녀의 친절함이 더해져 맛을 더욱 특별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맑고 푸른 아침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샌드위치 한 덩이를 작은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오이아까지 점심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주인장의 배려였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길을 나서니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커졌다.

길은 여전히 대서양을 벗 삼았다. 옆에서 찰랑거리는 짙푸른 바다는 리듬을 타며 귀를 간질 간질였다. 리시아의 청명한 하늘은 마음까지 맑게 해 주었다. 마을 골목을 지날 때마다 피어있는 들꽃들과 눈인사 나누듯 걷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남겼다. 작은 돌길이 발바닥을 스쳤고, 오르내리는 언덕길에서 숨이 차오를 때마다 몸과 마음은 길 위로 집중되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해안 절벽 위로 오이아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ía de Oia)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를 향해 창과 발코니가 열려있어, 파도와 바람이 함께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모여든 시토회 수도사들은 화려한 세속을 버리고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채웠다. 땅을 일구고 빵을 굽고, 수도원의 돌벽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 속에서 신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수도원의 회랑과 회색 돌담 사이에 고요한 시간이 여전히 스며 있었다.

세요를 찍고 수도원 앞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채우고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자 잠시 두고 온 가족이 떠올랐다 늘 함께 있어 당연했던 내 자리는 어떻게 채워지고 있을까. 떨어져 있지만 함께 하듯 따라오는 가족들의 걱정 어린 응원이 바람결에 스며들었다. 순례길에서는 그리움과 사랑을 더 깊게 품는 연습이기도 했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진 바다가 반짝이며 춤추고 있었다. 풍경 속에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서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마음을 따뜻하게 덥혔다. 가끔 자전거 순례자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경쾌한 페달질은 무거워진 내 걸음에 다시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긴 호흡으로 씩씩하게 걷게 했다.

언덕과 해안마을을 오르내리며 돌계단에 발가락이 시큰거릴 때마다, 바닷바람이 짭조름한 향을 실어 나르며 햇살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작은 오솔길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한 입, 한 입이 다시 걸음을 내딛을 힘을 더해줄 것을 믿으며 맛있게 먹어 치웠다.

오후 세시가 넘어서야 오늘의 종착지 바요나 구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지붕과 좁은 골목, 작은 광장이 차분하게 맞아주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목에는 산타 리베라타 교회(Iglesia de Santa Liberata)가 서 있었다. 1695년~1701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바로크 양식 특유의 장엄함과 섬세함이 공존했다. 산타 리베라타(Santa Liberata)는 바요나 출신 순교자로, 그녀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32km, 4만 5천 보를 걸었다. 나의 발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배낭을 보니 하루의 여정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고 돌아온 젊은 친구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활기찬 기운이 피로를 잠시 잊게 해 주었지만, 배고픔은 금세 나를 주저앉혔다. 역시 나는 순례길에서 배고픔이 모든 걸 이기는 것 같았다.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들어와 허기를 달랬다.

배가 부르니 몸이 저절로 눕길 원했다. 가만히 누워 사진을 정리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하루의 걸음과 마을의 풍경, 수도원과 교회에서 느낀 감정들을 마음속에 다시 그려보았다. 길 위의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음을 느끼며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바다는 어제 아 구아르다에서 본 노을과 또 다른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같은 바다였지만 각기 다른 빛을 내는 풍경이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 주었다.

발가락 물집과 긴 걸음이 가끔 힘들게 했지만, 그 덕분에 순간순간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순례길은 내 몸과 마음, 잊고 있던 감각까지 모두 깨웠다. 걷는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세상과 나를 조금 더 가깝게 했다. 오늘도 바닷바람 속에서 배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8화국경을 넘는 발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