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숲으로
인생은 여행이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 자체다.
린다 스톤
비고(Vigo) → 센다 다 아우가(Senda da Auga) → 세 데이라(Cedeira) → 레돈델라(Redondela)
거리 약 17km
포르투를 떠난 발걸음은 바닷바람을 안고 스페인에 닿았다. 발가락에 생긴 물집 사진을 SNS에 공유했더니, 먼저 길을 걸었던 순례자가 메시지를 남겼다. 약국에 들러 물집 보호 밴드를 구매했다. 발가락에 끼워보니 한결 편안했다. 길 위에서 주고받는 작은 정보와 관심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무척 고마웠다. 어제 동키로 보낸 배낭이 사라진 덕분에 오늘도 출발은 홀가분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 도시의 활기를 뒤로하고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길가의 작은 카페 문 앞에서 발걸음이 자동으로 멈췄졌다. 창문에 붙은 조가비와 화살표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를 자꾸 간질였다. 진열대를 바라보다 눈길을 끄는 이름을 발견했다. 산티아고 케이크(Tarta Santiago)’라니, 이름만으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길에서 만나는 특별한 달콤함은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았다. 아몬드 가루로 만든 케이크 한 조각을 커피와 함께 맛보았다. 고소하면서 촉촉한 풍미가 입안 가득 번지자, 지난 며칠의 고단함이 스르르 풀렸다. 케이크 위에 뿌려진 슈가파우더가 단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순례길에서 만난 작은 달콤함은, 길이 보내준 위로의 편지처럼 걸음을 즐겁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비고의 분주함은 사라지고 길은 점차 언덕을 향해 숲으로 이어졌다. 이 구간은 센다 다 아우가(Senda da Auga), ‘물의 길’이라 불린다. 오래전 산과 도시를 잇던 수로를 따라 난 길이 지금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길가에는 옛 수도관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숲의 적막을 깨웠다. 햇살이 나무 사이로 부서지듯 쏟아지고, 물소리와 어우러져 시원하고 경쾌한 멜로디처럼 흘렀다. 도시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 속에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바닷바람을 품었던 발걸음은 이제 물소리와 숲의 그늘 속에서 또 다른 편안한 호흡을 배우고 있었다.
학생 단체 순례자들이 길을 나선 모양이다. 숲길 한편에서 서로 장난을 치고 팔을 휘두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기라도 하듯 신나게 걷는 모습에 나도 함께 속도가 붙었다. 경쾌한 발걸음과 웃음이 숲 속을 흔들며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엄마 미소가 번졌다. 때로는 경쟁하듯 뛰고, 때로는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에서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 힘을 주는 듯했다. 아이들의 에너지에 내 마음까지 충전되었다.
길이 다시 하나로 이어지는 순례자의 만남의 도시, 레돈델라에 도착했다. 바닷바람을 안고 출발한 나의 발걸음과 내륙에서 걸어온 친구들의 발걸음이 포개어졌다. 광장 한쪽에는 오래된 탑을 얹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 있다. 타워의 집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Casa da Torre)는 16세기 중반 귀족 가문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시청과 사무실로 쓰였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순례자들에게 편안한 쉼을 제공하는 공용 알베르게가 되었다. 알베르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루 종일 걸어온 발걸음이 먼저 환영받는다. 목재 바닥과 오래된 돌벽 사이로 순례자들의 숨결과 이야기가 묻어 있었다. 최대 4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하루 10유로, 저렴한 가격으로 순례자들에게 제공된다. 샤워실과 공용 주방까지 갖춰진 공간은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고단함을 정리했다. 멀리 바다를 품고, 숲과 돌길, 언덕을 누빈 하루. 길 위의 웃음과 숲의 선율이 마음에 작은 불빛을 켰다. 발끝에 전해지는 행복이 하루를 풍성하게 채웠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일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와 길 위의 설렘을 상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웃음을 마음에 담으며 걸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