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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하룻밤

길 위에서 받은 선물

by 올리브

“희망은 절망의 반대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법정 스님


폰테베드라(Pontevedra) → 포이오(Poio) → 콤바로(Combarro) →아르멘테이라(Armenteira)


거리 약 21km


모두 잠든 새벽, 창밖으로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도착할 아르멘테이라의 수도원은 사전 예약이 되지 않아 서둘러 길 위에 섰다. 오후 1시부터 숙소를 선착순 배정이라니, 잠결에 몸을 추슬러 발을 내디뎠다. 아직 잠든 도시를 벗어나자, 바닷바람이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

폰테베드라를 지나면 포르투갈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대부분의 순례자가 걷는 정규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의 길(Variante Espiritual) 사색과 고요를 따라 걷는 길이다.

포이오 수도원, 콤바로, 아르멘테이라를 지나 ‘물과 돌의 길(Ruta da Pedra e da Auga)’ 숲길을 걷고, 아로우사 강 위에서 배를 타고 파드론으로 향한다.
전설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닿았던 길이라고 한다. 정규 루트가 발로 걷는 순례라면, 영적의 길은 마음으로 걷는 순례라고 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포이오 해안을 걷다 보니, 잔잔한 물결이 발끝을 감싸며 속삭였다. 초록 들판 너머로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순례의 의미가 꼭 종교적일 필요는 없었다. 걸음마다 내 안의 나를 마주하고, 그 시간 속에서 위로받는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콤바로에 도착하니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골목 사이로 스며든 짠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해안에는 오레오(hórreo)라 불리는 석조 곡식 창고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늘빛과 맞닿은 바다, 오랜 세월 숨결을 품은 돌집들이 내어주는 풍경이 마음을 시원하게 적셨다. 좁은 골목을 걸으며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을 감사로 채웠다. 고요하게 나를 품어주는 길을 따라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자, 아르멘테이라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도원에 도착해 동키로 보냈던 배낭을 찾고 숙소를 예약하려 했지만, 빈 침대는 없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근처 알베르게를 두 곳 찾아갔지만, 상황은 같았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는 고프고, 몸은 지쳐가는데 오늘 밤 내 몸을 누일 곳이 없었다.

허기를 달래려 카페에 들러 점심을 주문하고 매니저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숙소 한 곳을 소개해 주었다. 철석같이 믿고 찾아갔지만, 그곳 역시 빈방은 없었다.

‘오늘은 노숙인가…’ 절망이 스치려던 찰나, 벤치에 앉아 있던 스페인 친구 블랑카가 다가왔다. 내 이야기들 들은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돌려 숙소를 알아봐 주었다.
“순례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 에어비앤비가 있는데 괜찮겠어?”
“물론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택시까지 불러주었다.

“그라시아스(Gracias)!”를 연발하며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마음이 놓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순례자가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폴란드에서 온 안드레가 인사를 건네며 반겼다. 그도 숙소를 구하지 못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매년 자신을 위해 순례길을 걷는다는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 파파는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며, 특히 손주의 애틋한 사랑을 말할 때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한국 음식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편안한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지친 하루는 어느새 웃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가정집의 포근한 온기 속에서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함께 저녁을 나누며 감사로 가득한 밤을 보냈다. 예상치 못한 일들 속에도 늘 이유가 있었다. 절망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어쩌면 인연이 나에게로 걸어오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길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정한 얼굴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오늘 길 위에서 받은 모든 친절이 내게 건네진 다정한 선물이 되었다. 긴 하루 끝, 마음속에 작은 불빛이 켜진 듯 고요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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