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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웃게 한 하루

길 위에서 나와 마주하다

by 올리브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의 시작이다.”

칼 융


오 파소 데 메이스(O Pazo de Meis) → 루가르 라마스(Lugar Lamas) → 리바두미아(Ribadumia) → 카바넬라스(Cabanelas) → 폰테 아르넬라스(Ponte Arnelas) → 비야노바 데 아로우사(Vilanova de Arousa)


거리 약 21km


가정집의 포근함 속, 파파는 아직 꿈나라에 머문 듯 고요한 아침이었다. 조용히 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섰다. 편안했던 잠자리의 온기가 발끝까지 번져, 아침의 시작이 한결 가벼웠다.

포도를 따 먹은 것도 아닌데, 포도밭을 지키는 개 한 마리가 나를 도둑이라도 본 듯 으르렁거리며 짖어댔다. 아침의 고요함을 깬 것 같아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사방을 둘러싼 산이 내주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시골길을 따라 포도밭 사이로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과 흙 내음을 맡았다.

긴 그림자와 함께 걷는 시간, 바쁘게 달려온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길 위를 걷고 있는 나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 많이 행복하지?”
햇살이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고, 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갈 때마다 쌓였던 피곤과 긴장이 하나씩 흘러내렸다. 풀잎의 향기와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길 위의 작은 풍경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라미두이아 포도밭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햇살을 머금은 포도송이들이 알알이 반짝였고, 좁은 흙길 사이로 은근한 와인 향이 공기 속에 번져왔다. 향기만으로도 취할 듯 행복했다. 작은 수변공원에는 잔잔한 물결이 나무의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그늘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마음속 깊이 멍들었던 감정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내 안의 긴장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길이 건네준 여유 속에서 나에게 보내는 다정한 위로에 귀 기울였다.

배낭을 다시 메고 길을 나서자, 폰테 아르넬라스의 옛 교차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치형 돌다리가 마을과 마을을 잇고, 그 위로 오가던 상인들의 발걸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다리를 건너자 풍경이 서서히 달라졌다.

멀리서부터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밀려왔고, 하늘은 점점 푸르게 열렸다. 모래사장 위 백발의 여유로운 뒷모습과 느긋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배낭을 던지고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나를 괴롭히던 모든 불안이 다리 위에 놓인 듯 느껴졌다. 발끝에 전해지는 두려움이 나를 더 긴장시켰다. 그래서일까, 다리만 보면 심장이 요동쳤다.

다리 건너편 사내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 근심 없이 하나둘 다이빙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속 불안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심호흡하며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두려움은 물속에 던지고, 편안한 마음과 태연한 웃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오늘은 큰 쉼표가 필요한 날이었다. 숙소에 배낭을 던져두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다리를 건너 바닷가로 향했다. 모래사장 위에 발을 디디자 촉촉한 감촉이 온몸을 깨웠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물속에 몸을 맡기자, 차가운 바닷물이 피부를 스치며 다리 위에서 느꼈던 긴장을 몰아냈다. 파도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 안고, 작은 물살이 발목을 간질였다. 햇살이 반짝이는 물결 위로 팔을 저어 떠다니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그저 나에게 충실했다. 내 안의 어두웠던 그림자가 조금씩 웃으며, 자유와 기쁨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바닷물 속에서 누구보다 가볍고 행복한 몸짓으로 평온한 시간을 누렸다.

붉은 석양이 천천히 수평선 위로 내려앉고,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내 안의 그림자를 조금씩 웃게 만든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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