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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길

마음으로 걷는 순례

by 올리브

“항상 웃는 얼굴로 만나요, 웃는 얼굴이 사랑의 시작이니까요.”

마더 테레사


비야노바 데 아로우사(Vilanova de Arousa) → 폰테세수레스(Pontecesures) → 파드론(Padrón)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거리 약 48km

구름이 낮게 깔린 아침,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든 빌라노바 데 아루오사 선착장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난간을 잡고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배에 올랐다, 숨을 고르며 물결 위로 스며드는 구름 빛을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씩 잔잔해졌다.

오늘의 여정은 ‘트라슬라티오(Traslatio)’라 불리는 특별한 항로였다. 야고보의 유해가 예루살렘에서 갈리시아까지 옮겨졌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길, ‘Traslatio’는 라틴어로 ‘옮김’을 뜻한다. 배가 닻을 내린 파드론에는 그때 배를 묶어 두었던 바위 ‘페드론’이 남아 세월 속에서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순례자들을 태운 배는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움직였다. 강 위로 드문드문 솟은 십자가들이 길을 안내하듯 서 있었다.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석조 십자가 크루세이로(cruceiros)는 순례자들의 길을 축복하고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강가를 따라 서 있는 열두 개의 크루세이로는 모두 산티아고를 향해 있었다.

십자가 앞을 지날 때마다 순례자들은 손을 모았다. 나도 눈을 감았다. 길 위에서 느끼며 마주했던 모든 순간과 얼굴, 웃음과 침묵이 마음속에서 겹쳤다. 다른 순례자들과 시선을 마주치기도 했다. 낯선 이들의 웃는 얼굴과 “부엔 까미노!” 인사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서로 다른 사연과 삶을 품고 있지만, 지금 함께 같은 길 위에 서 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항상 일상에서는 앞만 보고 달려갔다. 아픈 남편을 대신해 가장의 자리를 지키며,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며 하루하루가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모른 채 버티며 살아온 것인지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 길은 오래 묵은 숨을 내쉴 수 있는 작은 틈이었다. 누구의 기대도, 누구의 책임도 내려놓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무겁게 쌓인 일상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걸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바람이 볼을 스치고, 잔잔한 물살이 난간을 두드리는 소리, 갈대와 물새들의 작은 숨결이 내 마음을 하나씩 깨웠다. 순례길은 단순히 걷는 것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호흡하며 삶의 소중한 감각을 되찾는 길임을 새삼 느꼈다.

나의 첫 산티아고 프리미티보 길은 나를 찾는 길이었다. 삶의 무게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그 길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다시 떠나온 포르투길은 조금 달랐다. 이번 길은 순례와 여행이 함께한 소중한 경험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했다. 가족과 물고기자리 식구들의 응원이 함께했기에 걷는 동안 모두의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 세상의 풍경 속에서 숨 쉬며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트라슬라티오, ‘옮김’이라는 뜻처럼, 이 길은 나를 또 한 번 옮겨 놓았다. 고단한 삶의 자리에서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한 나로 말이다.

배에 내려 카페에 들러 간단하게 빵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뒤로하고, 페트론에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 속에 그동안의 길을 차분히 되감았다. 순례길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자연, 잠시 손을 모았던 십자가, 혼자 마주한 내 마음의 울림이 스쳐 지나갔다.


산티아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대성당으로 향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웅장한 첨탑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길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 내 안에서 조용히 숨 쉬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인증서를 받았다. 내 발걸음을 증명하는 작은 종이 한 장이지만, 11일 동안 걸어온 시간과 마음, 모든 순간이 담겨 있었다. 인증서를 손에 쥐고 대성당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순례자의 발걸음이 모여 만든 광장에서, 나 역시 여정을 마친 한 사람으로 서 있었다. 파란 햇살 속에서 여유롭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순례를 마치고 저마다의 설렘과 평온이 스며 있었다.

들뜬 마음을 모아 배낭을 메고, 카메라 앞에서 점프샷을 찍어 가족들에게 보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함께한 순간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곧이어 영상통화를 켰다.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가족에게 전해졌다. 눈물이 흘렀다. 멀리 있어도 길 위에서 함께 울고 웃는 것만 같은 순간. 순례길의 끝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오늘의 숙소는 대성당 근처에 자리한 수도원 호스페데리아 산 마르틴 피나리오(Hospedería San Martín Pinario), 2박을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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