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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다시 걷게 하는 빛

끝에서 사작된 희망

by 올리브

“길은 걷는 이의 마음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파울로 코엘료


Santiago de Compostela, 이곳은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의 문턱이다. 누군가는 눈물로, 누군가는 미소로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표정을 바꾸는 하늘처럼 길을 걷는 동안 내 마음의 모양도 달라졌다. 하지만 모든 순간의 끝에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찬란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 머무는 빛,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음을 내딛게 했던 힘은 가족들의 단단한 사랑이었다. 일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보낸 시간이 이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 북쪽 언덕에는 오랜 세월의 숨결을 품은 수도원이 있다. 산 마티뇨 피나리오(San Martiño Pinario) 수도원, 이름 속에는 이곳의 뿌리가 깃들어 있다. ‘피나리오(Pinario)’는 라틴어 pinus(소나무)에서 유래된 말로, 수도원 정원에는 이름처럼 키 큰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다.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수도원은 찾아온 모든 발걸음을 포근하게 품어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다. 순례의 끝에서 흩어진 마음을 가만히 모으며 긴 여정 내내 함께 걸어준 가족을 떠올렸다. 걷는 동안 비워냈던 마음의 공간이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기도와 침묵, 순례의 여운이 깊게 배어 있는 이곳의 시간은 고요했다. 도착의 안도감과 아직 가라앉지 않은 떨림이 교차하며, 나는 다시 대성당으로 향했다. 두 번째 산티아고의 공기에는 낯섦보다 익숙함이 더 깊게 배어 있었다.

그곳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이가 있었다. 아르멘테이라에서 숙소를 찾지 못해 헤매던 날 도움을 주었던 그녀, 비야노바 데 아로우사에서 스치듯 인사하고 헤어졌던 그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목, 카페테라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기적처럼 마음이 통했다. 반가운 웃음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며, 우리는 산티아고의 마지막 밤을 함께하기로 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중심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Praza do Obradoiro)이 있다. 먼 길을 걸어온 이들의 마지막 발걸음이 모인 곳이다. ‘오브라도이로(Obradoiro)’는 갈리시아어로 ‘작업장(workshop)’을 뜻한다. 중세 시대에 대성당의 바로크 파사드를 세우기 위해 석공과 조각가들이 이곳에서 돌을 다듬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제는 그들의 망치 소리 대신 순례자의 숨결이 광장을 채우고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산티아고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는 순례의 종착점인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고요히 잠들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이 웅장히 서 있다.

석양이 번지는 서쪽, 광장 맞은편에는 15세기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세운 파라도르 호텔(Hostal dos Reis Católicos)이 자리한다. 병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스페인의 대표 호텔로 자리매김한 이곳에는 여전히 매일 선착순 10명의 순례자에게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햇살이 내려앉은 남쪽에는 은세공사들의 거리 플라테리아스 광장(Platerías)이 있다. 플라테리아스 문(Porta das Praterías)은 대성당의 유일한 로마네스크 정문으로, 문 위에는 예수의 생애를 돌에 새긴 조각들이 정교하게 남아 있다. 오래된 돌에 새겨진 장면들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되살아나고, 분수 사이로 순례자들의 웃음이 반짝였다.
고요한 북쪽에는 푸에르타 산타(Puerta Santa, 거룩한 문)가 있다. 사도 야고보의 축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성년의 해(Año Santo)’에만 문이 열린다. 사람들은 새로운 삶과 용서, 다시 시작을 맞이한다.

대성당의 동쪽, 프라사 다 퀸타나(Praza da Quintana), 벽 아래 비친 그림자 순례자(El Peregrino en la Sombra)가 홀로 서있다. 모자를 눌러쓴 형상이 돌벽에 드리워져 여전히 길 위를 걷는 듯하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시계탑 아래 순례자의 실루엣은 더욱 또렷해진다. 길이 끝나도 여정은 사라지지 않고, 순례자의 영혼은 그곳에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어둠을 깨고 아코디언과 만돌린 소리가 신나게 울렸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축제의 장이 되었다. 특별한 무대가 없어도 사람들은 어깨를 맞대고 리듬에 몸을 맡긴다. 돌바닥 위로 울려 퍼지는 선율은 순례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음악처럼 흘러갔다. 가벼워진 마음이 밤공기를 타고 퍼지고, 산티아고의 밤은 그렇게 또 다른 시작을 품었다.

사발에 와인을 따르고, 기쁨의 축배를 나누었다. 치즈와 빵을 곁들인 소박한 저녁이었지만 이야기는 그 어떤 잔치보다 풍성했다. 스페인 남쪽 론다와 말라가에서 온 블랑카와 로제 모녀보다 더 닮은 웃음을 지녔다. 두 여인은 사제지간이었다. 유쾌한 성격과 밝은 미소 속에서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함께한 제이콥 역시 재치 있는 입담으로 밤을 더욱 환하게 밝혔다. 짧은 영어와 손짓으로 이어진 대화였지만, 마음의 언어는 충분했다. 하하 호호 웃음이 멈추지 않는 여름밤이었다.

그녀들의 첫 산티아고, 여덟 번째 순례를 걷는 제이콥, 그리고 두 번째 산티아고에 선 나.
이제는 두 번째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저마다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다정한 사람들, 그들의 따스한 눈빛과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 또다시 나는 희망을 품었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단단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곳에 있다.

맑은 영혼으로 살게 해주는 산티아고, 내 안을 다시 채워주는 이곳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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