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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속으로 걸어가다_2

눈앞에 멈춘 시선 피카소 박물관

by 올리브

“예술은 우리 마음의 먼지를 털어낸다.”

파블로 피카소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먼지들이 하나둘 비워져 갔다면,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피카소의 그림은 그 빈자리 위로 새로운 사랑으로 천천히 채워주었다.

고딕 지구의 돌벽은 수백 년의 시간을 품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어 조용한 숨결이 되어 흐르고, 빛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피카소 박물관(Museu Picasso, Barcelona)에 닿았다.

박물관은 다섯 개의 궁전이 서로 이어진 구조였다. 팔라우 아구스티(Palau Aguilar), 팔라우 바루(Palau Baró de Castellet), 팔라우 마카야(Palau Meca), 라 카사 마우리아(Casa Mauri), 팔라우 피넬레스(Palau Finestres)로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시간이 건물의 기둥과 창틀, 계단의 모서리에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팔라우(Palau)는 카탈루냐어로 ‘궁전’을 뜻한다. 왕족과 귀족이 살던 공간에 피카소의 젊은 시절 시간과 예술을 입고 고요히 머물고 있었다.

안뜰의 그늘과 오래된 나무 천장, 좁은 계단과 돌길 사이로 이어진 전시 동선은 한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로 데려가는 듯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 작은 드로잉에서 유화, 도자기 실험까지 그의 손끝이 남긴 흔적을 천천히 더듬었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한 예술가의 마음이 흔들리고 멈추다 다시 나아가는 과정이 조용히 전해졌다.

피카소는 생애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푸른 그림자가 드리웠던 청색 시대, 따스한 빛이 번지던 장미 시대, 세상의 해체하고 다시 조립했던 큐비즘, 전쟁의 울음으로 스며 있던 게르니카까지 92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삶은 완성된 거장의 모습보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서로 맞물린 여정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거장 피카소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거장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전시장에는 젊은 피카소의 눈길이 손끝으로 어떻게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시작되는지 변화를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밤의 바르셀로나 카페에서 보았던 사람들, 사회적 고통을 마주한 이들의 모습, 서커스 단원과 거리의 사람들, 동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눈빛 모든 것이 작은 캔버스 안에 눌러앉아 있었다.

나의 발걸음을 오래 붙잡았던 작품은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초상이었다. 사랑을 얻지 못해 생을 놓았던 친구의 죽음은 피카소의 마음에 오래 남아 청색 시대를 열었다. 초상에 번진 푸른빛은 슬픔이 아니라, 떠나간 이를 붙잡고 싶었던 마음에 닿았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죽음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다가오고, 삶은 그 앞에서 작아진다. 남겨진 사람은 저마다의 속도로 마음의 모양을 다시 세우며 살아간다.

카사헤마스의 초상화는 오래도록 함께 살아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오랜 시간 병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 날은 마음이 앞서 달리고, 어떤 날은 작은 불안이 발목을 붙든다. 그럼에도 단단하게 매일을 살아왔다.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슬픔이 아닌 하루를 더 깊이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시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남편으로 아빠로 오래오래 함께해 주길 조용히 기도했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자 밝은 미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 안겼다. 작년 프리미티보길에서 함께 했던 조셉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숨이 턱까지 차던 오스피탈로 능선 위에서도 늘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빠처럼 든든하고, 삼촌처럼 장난스러운 조셉, 멀리서부터 두 팔을 활짝 벌려 다가오는 모습이 말보다 먼저 안부를 건넸다. 진심이 배어 있는 따뜻함과 반가움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산티아고 일정에 맞추어 여름휴가를 조율해 날 만나러 와주었다. 이 길은 마음이 모이고 사랑이 걸어 다니는 길이다. 언어가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나이차이가 있어도 중요하지 않다. 같은 풍경을 보고, 함께 걸으며 마음이 통하는 곳이다.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치고, 예약해 둔 식당에서 저녁을 나누며, 눈빛으로 주고받는 마음의 대화가 차곡차곡 쌓였다. 여행의 풍경보다 오래 마음에 남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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