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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속으로 걸어가다_3

여행의 마지막에서 만난 빛 파밀리아 대성당

by 올리브

“집이란 결국, 우리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의 방향이다.”

올리버 웬델 홈스


햇빛이 차오르는 시간, 사람들의 발걸음을 끝없이 끌어당기는 곳이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이다. 줄지어 선 관광객들의 얼굴에는 늦여름의 열기만큼이나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도 조용히 줄 끝에 섰다. 8월 말의 공기는 뜨거웠지만 성당을 향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묵직한 역사 속으로 한 걸음씩 스며드는 듯했다.

거대한 세 개의 파사드(Façade)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있다. 각각의 정면에는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며, 외벽만으로도 성경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가장 먼저 완성된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çade)는 가우디 생전에 유일하게 완성된 피사드다. 동쪽에 자리한 파사드는 기쁨과 생명의 상징처럼 식물 문양이 풍성하게 피어 있고, 조각 사이사이 작은 새와 동물들이 숨어 있다.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자리라 더욱 생기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이들이 이 파사드를 성당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반대편 서쪽에 있는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çade)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모진 풍파에 깎여나간 절벽처럼 단단하고 거칠며, 선과 면의 조형이 극단적으로 절제되어 있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상징하기에 장식 대신 침묵과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성당이 품은 가장 고요하고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는 듯했다.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영광의 파사드(Glory Façade)는 완성되면 성당의 정면이 될 공간이다. 구원의 길을 상징하며 인간이 나아가야 할 세계를 밝은 빛으로 표현할 예정이라고 한다. 세 개의 파사드가 모두 제 빛을 갖추게 되면, 가우디의 성당은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미완의 벽마저도 시간과 사람의 손길이 쌓여 만든 한줄기 숨결처럼 다가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문을 처음 연 사람은 가우디가 아니었다. 1882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비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가 네오고딕 양식으로 성당의 기초를 닦았지만, 재단과의 갈등으로 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안토니 가우디가 지명되면서 성당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가우디는 자연을 건축의 스승으로 삼았다. 건물 곳곳에 나무와 꽃, 동물, 빛과 바람 같은 자연의 섬세한 요소를 녹여 돌로 만든 성서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성당에 자신의 열정과 시간을 쏟았고, 독실한 신앙심까지 함께 바쳤다. 가우디는 1926년 6월 공사장을 오가던 중 전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허름한 옷차림과 지갑이 없어 노숙자로 오해받아 응급 치료가 늦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성당 지하의 납골당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가우디의 죽음은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의 예술과 신념이 남긴 불멸의 흔적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길가에 쓰러졌던 소박한 노인의 삶과 혼이 이곳에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숲 속에 들어온 듯 은은한 고요가 발끝부터 스며들었다. 성당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니 예수상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매달려 있었다. 빛을 받으며 맴도는 포도송이 장식 테두리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빛이 색이 되고 색이 노래가 되는 창문들이었다. 왼쪽을 바라보면 아침의 빛이 스며든 듯 푸른색과 초록이 부드럽게 번지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녁의 온기가 남은 듯 붉은빛과 황금빛이 퍼졌다. 빛은 성당 안에서 하루의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햇살이 강해지는 시간, 기둥 한쪽에 앉아 색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빛에 몸을 맡겼다. 잠시 눈을 감고 따스한 기운을 가득 느꼈다. 푸른빛이 마음을 식히고, 붉은빛이 다시 온기를 불어넣었다. 어쩌면 사람의 하루도, 계절도, 인생도 성당의 빛처럼 색을 바꿔가며 흐르는 게 아닐까.

성당 중앙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니 기둥들은 나무줄기처럼 곧게 뻗어 천장에서 다시 가지를 틔우고 있었다, 제대 앞 네 기둥머리 위에는 사자, 황소, 독수리, 사람의 얼굴을 한 천사가 조용히 성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음서의 상징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숲의 꼭대기에서 또 다른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듯했다.

영광의 파사드 쪽에는 언어가 서로를 만나는 문이 있었다. 70개국 언어로 새겨진 주기도문, 왼쪽 문 아래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한글로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순례길에서 마주쳤던 친구 얼굴들이 스쳤다. 서툰 언어로 나누었던 온기가 문 위에 하나로 모여있는 듯했다.

온통 평화로움으로 가득 찬 성당 안에서 마음의 소란은 모두 사라졌다. 성당 안을 가득 채우던 빛이 참 따스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머물던 햇살은 굳어 있던 마음속 작은 돌멩이까지도 살며시 만져주는 듯했다. 고요한 평온이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해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꼭 다시 오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밖으로 나오자, 햇볕은 조금 더 뜨겁게 나를 감쌌다. 성당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샹그리아 한 잔을 주문했다. 잔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과일 향이 입가에 웃음을 번지게 했다. 잔을 바라보다, 여행 동안 마음에 스쳐 지나간 풍경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포르투에서 시작된 푸른 바다와 하늘, 길 위에서 마주친 따뜻한 얼굴들, 스쳐가는 인사 속에 담긴 다정함, 용기 내어 내디덨던 수많은 발걸음들...

모든 순간이 참 고마운 선물이었다. 행복했고, 여러 번 웃음이 났고, 가슴 한쪽이 뭉근하게 데워졌다. 길의 끝에서 만난 잔잔한 평온이 마침표처럼 내려앉았다.

‘아, 이제 정말 돌아갈 시간이구나.’

떠나는 마음은 늘 아쉽다. 그래도 나를 기다려주는 사랑이 집에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품으로 다시 살아가게 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번 여행이 내게 건넨 힘을 기억하자. 나를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시간에게 애틋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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