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니스테레와 묵시아, 세상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출발
“끝은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T. S. 엘리엇
산티아고(Santiago) → 퐁테 마세이라(Ponte Maceira) → 무로스(Muros) → 에사로 폭포(Ézaro Waterfall) → 피니스테레(Finisterre) → 묵시아(Muxía) → 산티아고(Santiago)
산티아고의 아침은 맑고 산뜻했다.
끝이라고 믿었던 순례를 마친 뒤에도,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 걸음을 이어가는 순례자들이 있다. 이를 해안 연장 순례(Finisterre/Muxía Extension)라 부른다. 산티아고에서 피니스테레까지 약 90km, 4~6일에 걸쳐 걷고, 피니스테레에서 묵시아까지는 약 28km, 7~9시간 정도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순례 인증서에 스탬프를 찍으면 ‘Finisterre/Muxía 연장 순례 완료’라는 추가 인증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걷던 길을 내려놓고, 대성당 앞 광장에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 번째 정류장은 퐁테 마세이라(Ponte Maceira).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꼽힌 곳이다. 동화책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진 곳에 13세기 로마 시대에 세워진 돌다리 아래로 잔잔한 강물이 흘렀다. 짙은 녹음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돌다리를 천천히 건넜다. 마을을 찬찬히 걸으니 시간이 잠시 멈춘 듯 마음속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다음은 무로스(Muros), 바다 내음이 진하게 배어 있는 어촌 마을이다. 항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달달한 핫초코를 마셨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이 어우러진 풍경이 마음을 평화롭게 감쌌다.
이어 도착한 에사로 폭포(Ézaro Waterfall)는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유럽 유일의 폭포다. 산과 강,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서 물안개가 반짝였다. 발치에 닿는 물방울이 얼굴을 시원하게 적셨다.
드디어 피니스테레(Finisterre)에 도착했다. 이름 그대로 ‘세상의 끝(finis terrae)’이라 불리는 곳이다. 산티아고에서 약 90km 떨어진 이곳은 고대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지점이다. 바다로 이어진 언덕 끝, ‘0km 표지석’ 앞에 섰다. 이전의 표지석과 같은 모양이지만, 0km가 주는 감동은 훨씬 깊었다. 숨을 고르며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언제나 웃으며 잘 지내주어 고마워. 충분히 잘하고 있어.”
절벽 위 십자가 조형물 아래에서는 백파이프 선율이 울려 퍼졌다. 순례의 마무리를 축복하듯, 마음을 울리는 음악 소리가 대서양 바람을 타고 멀리 흘러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생각보다 고요하고 따뜻했다. 언덕 끝에는 순례자의 신발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신발을 벗어두며 지난 여정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과거에는 신발이나 옷을 태우며 길의 마침표를 찍기도 했지만, 지금은 환경과 안전을 위해 금지되어 있다.
남편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견뎌온 나의 무게, 아이들이 자라면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과 마음 덕분에 조금씩 내려놓아도 되는 무게, 신발 사진 한 장과 함께 내 안의 짐과 걱정을 조용히 덜어내고 또 다른 시작을 맞이했다.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이었다.
버스는 해안을 따라 묵시아(Muxía)로 향했다. 또 하나의 끝을 품은 마을이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 위로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바르카 성당(Iglesia de Nosa Señora da Barca)이 서 있고, 옆에는 커다란 조형물 ‘깨진 파도(A Ferida)’가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이 작품은 2002년 기름 유출 사고로 상처 입은 바다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묵시아에도 피니스테레처럼 ‘0km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표식은 또 다른 끝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하루 동안 여유 있게 돌아본 피니스테레와 묵시아의 바람이 내 안의 무언가를 비우고 다시 채워주었다. 하늘과 맞닿은 끝없는 바다 위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힘들 때마다 이곳을 떠올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풍경을 눈과 마음에 꾹 눌러 담았다. 파도가 돌바위에 부딪치며 흰 포말을 흩뿌릴 때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마음이 따뜻했다. 바다와 바람이 속삭이는 응원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버스가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멀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끝이란 멈춤이 아니라, 다시 걸어가기 위한 숨 고르기라는 것을, 피니스테레와 묵시아는 내게 따스한 용기를 남겼다. 멈추지 않고 다시 걸어야 하는 이유, 마음속에 품어야 할 용기를 가득 채운 채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끝에서 배운 새로운 시작, 이 시간을 힘들 때마다 꺼내봐야겠다. 길의 끝에서 만난 바다는 또다시 나를 앞으로 걷게 만드는 힘처럼 느껴졌다. 길의 끝이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짧은 쉼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곳에서 마주한 나의 쉼과, 내려놓은 무게를 기억하자.
나에게 인사했다.
"부엔 까미노, 나의 또 다른 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