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함께 걷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레돈델라(Redondela) → 아르카데(Arcade) → 폰테 삼파오(Ponte Sampaio) → 비야보아(Vilaboa) → 폰테베드라(Pontevedra)
거리 약 20km
레돈델라는 포르투갈길(Camino Portugués)과 스페인 내륙길(Camino Portugués Interior)이 만나는 지점이다. 포르투(Porto)에서 출발한 순례자와 뚜이(Tui)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합쳐진다. 길 위에는 발걸음과 인사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짧은 인사 ‘부엔 까미노’(Buen camino!)가 울려 퍼졌다.
이번 순례길은 날씨 요정이라도 따라붙은 듯 맑은 날의 연속이었다. 마음을 놓은 탓인지 여자의 마음과 같다는 갈리시아 지방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우의도 챙기지 않고 배낭을 동키로 보내고 출발하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하늘을 뒤덮던 구름 사이로 시원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진 빗방울은 어깨와 머리카락을 적시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멈추자, 일상에 치여 흔들리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날들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해야 할 일들에 지쳐 있던 마음을 빗속에서 길게 내뱉었다. 갈리시아의 비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찬찬히 위로해 주었다.
나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음을 멈췄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순례자들도 각자 한 곳에 앉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아도 같은 마음으로 같은 풍경을 공유하며 잠시 머무는 듯했다. 길 위의 공기가 잔잔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빗줄기는 세차게 내렸다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풀잎과 나무들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생기 있게 빛났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니 세상의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내 안에는 빗소리와 숲의 향기, 길 위의 고요한 숨결만이 함께했다. 길 위의 모든 순례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겠지만, 내리는 비를 보며 묘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잠시 세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함께 나눴다.
아르카데(Arcade)는 이 구간의 풍경 포인트다. 석조 다리 폰테 산 파에(Ponte Sampaio)를 건널 때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진다. 고요한 강물 속에는 옛 전쟁의 흔적이 잠들어 있고, 돌 위에 새겨진 시간의 이야기가 발끝으로 전해진다.
숲길로 들어서면 세상의 소란은 사라지고 새소리와 물소리, 촉촉하게 젖은 나무들이 내뿜는 향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숨을 고를수록 길 위에서 느끼는 평온함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폰테 삼파오 다리 너머로 포도밭이 펼쳐졌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는 빗방울을 머금고 더욱 탐스럽게 빛났다. 손을 뻗어 한 알 따먹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었다.
걷는 동안 마음은 점점 단순해졌다. 스스로 방향을 잡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돌아보았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로서 머무는 시간이 즐거웠다. 갈리시아의 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내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길을 잃은 듯한 순간도 있었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는 순간도 있었다.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나 자신을 천천히 위로하며 다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2시, 점심도 거른 채 걸어온 길 끝에 폰테베드라의 지붕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비가 왔나 싶을 정도로 맑게 개인 하늘 덕분에 피곤함은 사라졌다.
도시의 중심에 둥근 모양의 특별한 교회 앞에 발걸음이 멈췄다. 순례자 성모교회(Capela da Virxe Peregrina)였다.
교회는 조개껍데기 모양으로 지어진 독특한 건축물로, 순례자의 상징을 건물 자체에 담고 있다. 내부 제대에는 순례자의 차림을 한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망토를 걸치고, 지팡이와 조개껍데기를 지닌 성모의 모습은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순례자 같았다.
간간이 내린 빗방울 하나하나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오늘 내린 비는 한낮 더위에 지치지 않고 잠시 쉬어가라는 나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처럼 다가왔다.
걷고, 멈추고,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나로서 머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