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걸음이 만나는 자리
“여행은 우리를 바꾸지 않는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상세구간]
바요나(Baiona) → 아 라말로사(A Ramallosa) → 닛그란(Nigrán) → 프리에게(Priegue) → 코루호(Coruxo) → 비고(Vigo)
거리 약 27km
순례길에 나서기 전, 올케가 나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네일 아트였다. 뭉툭하고 못생긴 발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꾸밀 생각조차 없던 발톱, 요리하는 손이라 늘 짧게 잘라 두던 엄지손톱 위로 ‘Santiago’라는 글자와 노란 화살표 무늬가 소박하게 그려졌다.
소담한 네일과 엄지발가락 옆으로 부풀어 오른 물집이 진짜 순례자답게 느껴졌다. 소박함과 투박함이 발끝에서 어깨동무하듯 함께하니, 길 위에 남긴 흔적을 선물 받은 것 같아 아픔이 살짝 누그러졌다.
바요나 해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과 파도에 닳고 씻긴 언덕 위로 12세기 요새 몬테레알 요새(Fortaleza de Monterreal)가 묵묵히 서 있었다. 항구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후 가장 먼저 귀환 소식을 전했다는 카르벨라 라 피냐타(Carabela La Pinta) 모형선이 정박해 있었다. 그 옆을 지나며 나의 작은 여정도 대서양의 거대한 역사 속 한 점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두 시간 남짓 걸으니, 아 라말로사(A Ramallosa)의 석조 다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13세기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공존하던 시대에 세워진 다리는 10개의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리 중앙의 십자가 기둥과 산 텔모(San Telmo)의 작은 조각상은 돌 위에 쌓인 신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항해자들의 수호성인 산 텔모가 기도로 폭풍우를 가르고 다리를 지켜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듯 바람에 스치는 공기조차 경건했다. 수백 년의 숨결이 내 발 끝에 스며드는 듯해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십자가 하나가 흐르는 시간 위에서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고요한 마음을 선물했다.
길은 이내 마을 풍경으로 이어졌다. 닛그란(Nigrán)에 들어서자 좁은 골목과 돌담, 전통적인 갈리시아식 건물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웃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성모 앙구스티아스 성당(Iglesia de Nuestra Señora de las Angustias)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들어가 뒤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기도의 언어는 달랐지만, 마음을 모으는 순간만큼은 경계가 없었다. 쌓였던 피로와 생각을 내려놓으며 고요하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노란색 ‘SANTIAGO’라고 적힌 조가비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래전 누군가 남긴 흔적일까, 아니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의 작은 장식일까. 조가비 하나가 내 마음을 잠시 붙잡았다. 마을의 정취 속에서 조용히 쉼을 얻는 듯했다.
첫 순례길이었던 프리미티보 길이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했다면, 이번 포르투길은 여행 같은 여유와 활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왔다는 젊은 순례자는 밝은 미소를 머금고 가뿐히 걷고 있었다. 길에 핀 꽃을 보며 환하게 웃고,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딸은 보는 듯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발걸음을 따라 걷는 내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니 비고(Vigo)가 눈앞에 펼쳐졌다. 항구의 크레인, 높은 빌딩, 분주한 시장과 광장의 활기가 나를 맞아주었다. 고요한 대서양을 곁에 두고 작은 마을을 지나온 발걸음이 어느새 대도시의 박동 속으로 스며들었다.
일상처럼 흐르는 시간을 걷는 동안 길 위에서 나와 마주한 하루였다.
발끝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길.
한 걸음 한 걸음 쉼이 되어 나를 감싸 안으며 오늘의 순례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