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첫날, 잠시 멈춰도 좋은 이유
포르투 대성당 (Sé do Porto) – 마음의 출발점
도우루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도시를 품에 안은 듯한 자리에 포르투 대성당이 서 있었다. 이곳은 산티아고 포르투길의 공식 출발점이다.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머금은 성당은 시간을 입고, 믿음을 품은 듯 단단하고도 깊었다.
두껍고 묵직한 벽, 작고 둥근 창, 요새처럼 견고한 외관은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위로 수백 년에 걸쳐 덧입혀진 화려한 장식과 황금빛 곡선은 바로크의 찬란함을 더했다. 고요함과 화려함, 단단함과 섬세함이 켜켜이 쌓여 성당을 빚어냈다.
웅장한 성당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 출발전 기도를 올리려는 순례자들까지 더해져 입장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머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북적이는 분위기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성당 앞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출발을 알리는 첫번째 세요를 찍었다.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어우러져 북적이는 풍경 속에서 나는 조용히 출발을 준비했다.
상 벤투 역 (Estação de São Bento) – 멈춰야 할 이유
역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상 벤투 역은 조금 달랐다. 기차를 타지 않아도 잠시 멈춰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한 역이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마법이 숨어있었다.
포르투 대성당에서 도우루 강 쪽으로 천천히 내려오다 보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오래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겉모습은 낡고 단정한 기차역이지만, 한 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정말 역 맞아?’ 싶은 착각이 인다.
높은 천장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 벽면을 가득 채운 2만 장이 넘는 아줄레주(Azulejo) 타일이 이 역의 진짜 주인공이다. 아줄레주는 유약을 입힌 세라믹 타일로, 포르투갈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상 벤투 역에는 이야기가 펼쳐져있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커다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벽화는 타일화의 거장 호르헤 콜라소(Jorge Colaço)가 1905년부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단순한 건축 장식으로 여겨졌지만, 아줄레주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로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예술가다.
천정까지 이어진 벽화는 위, 아래로 나뉘어 있다. 윗쪽에는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과 마을 축제처럼 서민들의 일상이 정겹게 담겨 있었고, 아래쪽에는 역사책 한 페이지를 펼친 듯 전쟁, 정복, 왕의 행진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하나하나의 타일이 모여 시간이 새겨둔 파란 연대기처럼 느껴졌다.
플랫폼으로 발을 옮기자 다른 세계가 떠올랐다. 해리포터가 마법학교로 떠나던 ‘플랫폼 9와 ¾’을 찾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플랫폼 9와 ¾는 런던 킹스크로스역이 벼경이지만 소설 속 판타지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망토를 입고 부엉이를 품에 안은 마법사들과 빨간 기차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속에 멍하니 잠겼다. 기차역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이렇게 품격 있는 예술과 마주할 수 있다니 뜻박의 호사였다. 어쩌면 진짜 박물관보다 더 깊이 감동을 주는 곳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숨을 고르며, 이것이 진짜 포르투만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었다.
도우강 (Rio Douro) – 시간을 건너다
도시를 반으로 가르며 흐르는 도우강 위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유화처럼 잔잔하고 깊었다. 강 위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놓인 루이스 1세 다리(Ponte Luís I)는 포르투의 심장과 같은 존재다. 위층과 아래층 두 개의 보행로로 이루어진 철제 아치형 다리는 포르투의 구시가지와 강 건너편 가이아(Vila Nova de Gaia)를 잇고 있다.
다리는 19세기말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héophile Seyrig)가 설계했다.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철교였다고 한다. 거대한 강철 구조물임에도 어딘가 섬세해 보였다. 도시의 중세적인 감성과 근대의 진보가 다리 위에서 나란히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 위 전망대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겠지만, 클레리구스 탑에서 받은 감동으로 충분했다. 아래층 보행로로 천천히 걸으며 가이아로 방향을 잡았다. 도시의 향기가 뒤섞인 강바람이 코끝을 스쳤고, 철제 구조물 아래로 햇살이 반짝였다. 흐르는 강물은 내 안의 감정들까지 끌고 흘러갔다. 흘려보내야 할 것들, 다시 품어야 할 것들, 오롯이 나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다리를 건넜다.
강을 건너면 바로 포트 와인(Port wine)의 도시 가이아다.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의 포르투 항구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17세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아 온 와인이다.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강화와인(Fortified Wine)으로, 일반적인 와인과 달리 발효 중간에 브랜디(포도주 증류주)를 첨가해 발효를 멈추기 때문에, 당분이 남아 있어 달콤하며 도수(약 18~20도)가 높다.
도우강을 따라 크고 작은 포트 와인 저장고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와인 시음과 투어를 즐기기에 최고의 장소 같아 보였다. 나 같은 애주가에겐 천국 같은 거리지만, 오늘은 눈으로만 가볍게 맛보았다. 더 욕심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빌라 두 콘드 (Vila do Conde)로 가는 길
다른 순례자들이 33km를 걷는 동안, 나는 도시를 누비며 포르투와 데이트를 즐겼다. 렐루 서점에서는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듯했고, 클레리구스 탑에서는 온몸이 기억할 만한 풍경을 만났다. 상 벤투 역은 현실과 상상이 겹쳤고, 도우강을 건너며 복잡한 감정을 함께 흘려보냈다.
가족이 떠올랐다. 혼자 마법 같은 하루를 누리는 기분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도시를 누비며 누린 특별한 시간을 돌아가 곱절로 살아내겠노라 다짐했다. 오늘 마신 바람과 풍경, 감정들을 차곡차곡 담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쯤 걸려 빌라 두 콘드에 도착하니 조용한 셀렘이 밀려왔다.
오늘은 눈과 마음으로 충분히 걸었다.
걷기는 내일부터, 발바닥이 수고해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