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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 청년 사업가에서 법인 대표가 되기까지

청소년진로직업 '내 삶이 곧 내 진로'

by 캠강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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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18살.

공부를 잘한 건 아니었지만 53명 중 10등 안에 들었다.

이과를 강요하던 아버지 뜻대로 치열하게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 사업이 점점 어려워졌고, 난 오빠의 제수.. 삼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부모님은 조용히 날 부르셨고 그날 내 미래는 결정되었다.


내 삶이었고, 내 미래였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이 내 미래를 결정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난 알지 못했다.

당연하다 생각했다.

부모님 말이 맞다고, 그게 순리라고.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에 집중해야 할 그때, 아이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그때.

나는 진학이 아닌 취업반으로 변경했고, 학교 선생님들은 다시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미래는 이미 결정이 끝났고 난 집안의 경제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취업반에 들어가자 내 성적은 2등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관심은 더 이상 공부나 시험이 아니었다. 모두가 취업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살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ㅁ00'에 채용이 되었다. 3개월 수습기간 중 받았던 월금은 40만 원 남짓이었지만 정직원이 된 뒤 내 월급은 몇 배 이상이었다. 그때 19살 내가 받았던 정직원 첫 월급이 30년이 지난 지금 직장인 초봉보다 높다면 믿겠는가?


가족들은 늘 미안하다고 했지만 내 월급 통장을 받은 엄마의 미소는 행복해 보였다. 엄마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아버지 사업이 번번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몇 년 동안 목돈이 된 내 월급은 생활비와 목돈이 되어 집을 지탱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겠다며 제수, 삼수를 반복하던 오빠는 결국 원하지 않는 대학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도 난 알고 있었다.

'밑 바진 독에 물 붓기'라는 사실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속담. 보람 없는 헛수고. 노력 대비 결과가 없는 상황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직장은 복지도 너무 좋았다. 직원이 2000명이 넘는 큰 회사?(자세한 직종, 이름은 언급이 어려움) 동료가 있었고,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름 친절한 직원으로 상도 받았으며 직원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1997년 IMF (국제통화기금, 한국이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국제통화기금에 구제 금융을 받은 사건)로 대한민국이 엄청 큰 위기였고, 국민들이 나서서 금 모으기 운동을 하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잘리고, 거리로 내몰리고, 생명의 끈을 놓았던 그 어려웠던 해에도 내 첫 직장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내 일상을 안전하게 지속할 수 있도록 해 줬다. 해마다 명절 때면 떡 값으로 50만 원을 입금했고, 3개월에 한 번씩 상여금 100% 월급의 2배를 입금했다.


인지도 있던 내 직장과 내 안전한 위치는 언제나 엄마의 자랑이었다.

친척들과 지인들에겐 엄친아, 엄친딸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처럼 대학생활을 하지도, 캠퍼스 낭만을 느껴보지도 못했지만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살 중반 지인을 통해 상권이 좋은 곳에 유명 0ㅁ제과 체인점을 개업했고, 직장을 다니면서 개업했기에, 부모님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매출이 오르니 욕심도 커졌다.


옆 매장까지 인수하기 위해 부족한 돈은 잘 다니던 직장의 퇴직금과 카드론 대출금으로 사업체를 늘려갔다. 회사를 나올 땐 주위의 부러움과 질투가 있었고, 난 많이 속상함을 감추며, 행복하고, 다 가진 듯 행동했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처음엔 가족이 똘똘 뭉쳐 운영을 했고, 이후 직원 5명을 채용하며 사업규모도 키웠다. 이후 2020년 코로나가 시작하기 전까지 4번에 커피전문점을 더 운영했었다.


1999년 20살 중반 첫 커피전문점은 oㅁ**. 지금처럼 커피머신이 없던 시기였기에 드립 방식의 원두커피와 생과일주스, 컵과일, 계절메뉴등을 판매했다.


그러다 결혼과 출산으로 딸을 낳고, 둘째를 준비하며 남편과 시댁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진행하고 있던 사업을 정리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갈증은 멈추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4곳의 대학을 10년 다녔다. 그러면서도 일은 계속 쉬지 않았다.


2005년엔 20과목을 운영하는 문화센터, 2008년엔 더 확장해 한국문화센터 지부, 2010년엔 주식회사법인 평생교육원(많은 사람들이 생소해했던 커피바리스타 자격증과정을 운영)을 운영했었고, 그 시기엔 획기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커피전문점과 창업반을 동시에 운영한 프로젝트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2012년 인터넷신문 편집장, 2014년 사단법인 00일 자리협회를 운영하면서 전문강사 양성기관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양한 프로그램 공예, 인문학, 자기계발, 강사프로그램을 문화센터 개념으로 운영하면서 역시 출입구 2개인 공간을 계약해 전혀 다른 공간의 와플, 솜사탕커피등의 커피전문점, 2015년 커피머신이 필요 없는 천사의 눈물이라고 들어 보았는가? 대학교와 70년 역사의 초등학교 근처 상권으로 1층 7종류의 드립커피전문점을 운영했는데,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일반화되지 않은 드립커피.


문화센터, 평생교육원, 일자리 관련 전문강사를 양성하는 협회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진로직업지원센터'운영위원을 거쳐 구청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프로그램과 일자리 주무처 심사위원까지 청소년 진로와 직업교육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이젠, 청소년들이 궁금해하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부터 사무직, 전문직, 수공예 관련 진로 이야기까지 내가 경험해 보고, 배워보고, 알고 있는 것을 이 글을 통해 담아내보겠다.




배움과 경험이 남긴 교훈


1. 내 선택이 아니어도 경험은 자산이 된다
→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 안에서 얻은 배움이 결국 내 진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 작은 책임이 큰 힘을 만든다
→ 19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책임감, 근성, 성실함을 배웠습니다.


3. 한 번의 직장 경험이 평생의 밑거름이 된다
→ 첫 직장에서의 경험은 이후 창업, 강사 활동, 조직 운영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청소년에게 전하는 조언


지금 배우는 과목이나 아르바이트가 왜 필요한지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실히 경험한 모든 순간은 결국 내 진로의 재료가 됩니다.


지금은 "힘들다, 왜 해야 하지?"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강점으로 돌아옵니다.



실천 다짐 (학생 참여형)


오늘 이 글을 읽는 청소년이 있다면,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나 활동에서 얻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부모님이나 학교의 선택이라도, 그 안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내가 앞으로 경험하고 싶은 아르바이트나 활동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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