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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2] 책과 글과 그리고 산

by 심바

아직 여름이 가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 나에게 20일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은 더 매섭게 느껴졌다. 종종 한강에서 달리기도 해주어야 하는데 벌써 겨울이 턱밑까지 성큼 와버린 느낌. 수족냉증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추위란 늦게 올수록 좋은 법이다. 내일모레 등산 약속은 어쩌지, 등산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추위에 질려버릴 수도 있는데...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는 만고불변의 진리법칙에 따라 날씨가 평년 기온을 되찾았다. 다행이다.



몇 년 만에 산을 오르는 친구, 저번 등산 때 발목을 접질려서 산 중턱에서 미타임 신나게 보낸 친구, 그리고 이번에 이 산을 두 번째 올라가는 친구와 같이 하늘도 참 예뻤던 오늘 산에 올랐다.

넷이 그나마 만나기 쉬웠던(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와야 했던 친구야 I am sorry but I lov...) 청계산이 오늘의 목적지. 화창한 날을 온몸 가득 느끼고 싶어 하는 등산인들이 지하철역 안과 밖에 그득 이었다. 내 마음이 같이 달떠올랐다.



"등산화 신고 나왔으면 매봉까지는 올라가야지, 오늘은 노 머씨 예외 없습니다~"

우리 넷 모두 운동에 진심인 사람들이라 청계산이 처음이었던 친구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에 우리 여기 이렇게 모였으니 정상에서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싶다는 내 욕심도 한 스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걸음 두 걸음 채워가며 평화로운 청계산의 가을을 온몸에 담았다.




오늘은 유독 고양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벤치 옆 햇빛이 바삭하게 드는 명당에서 식빵을 굽고 있던 호랑이 같은 냥이와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는 까만 털로 우리들을 유혹하던 냥이가 아직도 아른아른. 우리가 앉아서 자기를 이쁘게 본다 싶었는지 동네 강아지처럼 배를 까뒤집어 포즈를 취하던 식빵냥과 무릎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등을 쓰다듬으라던 블랙캣. 난 고양이보다는 강아지파이지만 애교로 무장한 고양이들은 무적이었다. 조금만 덜 올라왔다면 당장 어느 편의점에 뛰어가 츄르와 캔을 사 오고 싶을 정도로. 날씨가 부디 천천히 추워지기를 조금 바래주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새파란 하늘 속 딱 알맞게 예쁜 구름 아래에서 돌아가서 정상석 인증사진을 찍었다. 이마저도 어찌나 각양각색인지, 뒹구는 낙엽만 보고 까르르 할 나이도 한참 지났는데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비비빅 하나 꺼내 먹어야 할 무인아이스크림통이 비어있어 좀 아쉬웠지만 대신 더 달디단 사과와 오이 한쪽을 맛있게 먹고 부지런히 올라온 길을 되짚으며 내려갔다. 목표는 진흙탕 가득한 엉뚱한 길 말고 올라왔던 길 그대로 다시 내려오기, 내려오고도 아리송했지만 대충 성공이었다.


내려올걸 왜 올라갔느냐 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함이기도 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두부'. 저속노화식에 진심인 친구도 만족한 이 식당에서 통창이 모두 열려 구름이 예쁘게 올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신나게 풀기 시작했다. 서로의 근황도 얘기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했지만 오늘 우리 네 명이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바로,


책과 글쓰기



우리 넷 모두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으며, 좋아하는 작가나 책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오늘 한 친구가 너무 멋진 작가님을 실제로 만나 너무 우연처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자리에 초대받아 다녀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눈물을 흘려버렸다. 세상에 눈물이다. (이 친구는 과거 내가 사 온 '행복 찹쌀떡' 포장지를 보고 눈물을 흘린 전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좋은 책과 작가를 만나 행복했을 그 마음을 너무나 알겠어서, 진심으로 친구가 행복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우리는 책을 얘기하며 떠들고 웃고 울었다. 서로 말만 하면 잊어버린다며 작가 이름과 책의 제목을 톡방에 부지런히 적어주었다. 든든하다, 든든해!






이름은 분명 근사했는데 맛은 정말 딱 율무차 그 자체였던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 구석에 남아있는 수다를 마저 털어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잘 왔는데 엄마가 집에 없어 허전한 아이가 걸어온 영상통화가 이제 곧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알려준다. 하늘도, 날씨도, 여기저기 단풍이 조금씩 들어가던 산도 너무 예뻐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던 오늘의 등산. 우리는 자연스레 다음 약속을 정했다. 한 달 뒤 완연한 가을 속에서 이 산을 한 번 더 올라보자고. 발차기로 무려 수영장을 10바퀴를 돌지만 대체 숨은 언제 트이는거냐며 수영에 진심인 친구를 위해 그다음 달에는 다 같이 수영장도 가기로 했다. 미안한데 나는 샤워는 먼저 혼자 하면 안 되겠느냐는 눈물 친구에게 안될게 뭐가 있겠느냐고 했다.(하지만 나는 다 같이 씻을 수 있어 친구야)


책으로, 글로

씨줄과 날줄을 엮듯 촘촘히 엮여가는 우리들 사이.

켜켜이 쌓이는 시간 그 안에 가득 차는 건 결국

웃을 수밖에 없는 행복. :)




+) '웃을 수밖에 없는 행복이야'라는 표현은 친구를 쏙 빼닮은 초등학교 1학년 막둥이가 실제로 한 말이다.

넌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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