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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처 Apr 04. 2023

 북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함선을 보며 함순을 생각한다

그와 나 사이, 함순과 새순 사이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지만

눈보라를 헤치고 그가 쇄빙선을 몰고 온다

굶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움푹 패인 볼, 함구하는 입

얼어붙은 갑판 위에 자작나무 빗자루처럼* 선 다리가

으르렁거리는 얼음의 두께를 감지한다

얼음이 움직인다

안개 속으로 부딪힐 듯 지나가는 얼굴들, 선박들

눈처럼 하얀 냅킨과 포개놓은 빵

그의 신부가 던진 부케가 떠돌아다니는 북해를 지나

한 가지 연료만으로 견디는 쇄빙선 위에서

그의 기관도 식초에 절인 청어만으로 견딘다

바람 없는 날이 계속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날에도

퀴퀴한 선실에서 함순은 책을 읽는다

이따금 하모니카를 분다

침묵으로 허구한 말을 함축하는 함순

누군가는 시인이라 하고

누군가는 혁명가라 하고

누군가는 떠돌이라 했다

소문은 항구에서 항구로 유빙처럼 떠다닌다

겨울바람을 머플러처럼 두른 바닷가 마을

일각고래의 항로를 따라 여름은 오고

사는 일이 슬퍼 더 이상 공동묘지를 배회하지 않으리라

함몰호 같은 눈을 한 그가 오랜만에 입을 열어 함수초처럼 웃는다

언제든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는 듯

매서운 추위와 긴 밤을 끌고 그가 온다

 

                             

                                          * '굶주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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