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우주는 깨어나고 있었다》
눈을 떴다.
새벽 4시 10분.
다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눈을 뜨는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나무 아래에서 마주했던 순간들,
그날의 모든 장면이 마치 바다 위에 펼쳐진 스크린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더는 잠을 청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9시가 기다려졌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한 잔 마시고 식탁에 앉았다.
조용한 새벽, 정적 속에서 홀로 머무는 시간은 어쩐지 낯설고 위태로웠다.
머릿속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의 손길, 그의 온기, 그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생을 ‘청순한 아내’ ‘단정한 어머니’라는 틀 안에서 살아왔던 내가,
그날의 뜨거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믿기 어려웠지만, 그것 또한 분명히 나였다.
남편과의 관계는 더 이상 설렘이 아니었다.
의무처럼 반복되던 일상이었다.
오늘 새벽에서야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남편이 일어났다.
“뭐 해? 안 자고 있어?” “응, 밥 준비하려고.”
시계는 4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을 다녀간 후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의 기억은 바다 위를 떠도는 뭉게구름처럼 흩날렸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지금만큼은 그 장면들을 가슴 깊이 품고 싶었다.
찬물로 샤워를 했다.
물기를 닦으며 거울 앞에 섰다.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내 몸 안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작고 가녀린 몸 안에, 끝없는 우주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우주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했다면, 분명 정신과 상담을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진짜 나를 마주한 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간직해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된장국을 끓이고, 계란말이를 부치고, 김을 구웠다.
밥에는 찹쌀을 살짝 섞어 고소함을 더했다.
남편은 언제나 가장 먼저 식탁에 앉는다.
아이들은 대개 간단하게 식사한다.
남편은 잦은 술자리로 인해 건강을 의식하고 있었다.
8시 5분.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신의 은총으로 9시에 공원 입구에서 뵐 수 있다면 참 기쁘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이따 봐요.”
그 짧은 문장을 보내는 데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였다.
그 기분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묘했고, 기쁨은 감춰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다시 샤워를 했다.
머리는 정성스럽게 말렸다.
어제 골라둔 옷을 꺼냈다.
검정빛 바탕에 붉은 단풍 무늬가 은은하게 스며든 미니 원피스이다.
남편이 “섹시하다”고 칭찬했던 옷이었다.
언젠가 이 옷을 입고 남편 회사 앞에서 만났을 때,
그는 점심 식사 후 나를 모텔로 데려갔고, 그날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도, 지금의 감정과는 다른 결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스스로도 예뻐 보였다. 남편이 선물한 향수를 뿌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0분. 정확히 9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나섰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공기의 결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스 밸브를 점검하고 현관을 나섰다.
경비실 앞 나무들조차 오늘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차를 끌고 공원 앞에 도착했다.
운동복 차림도 아니었고, 걸어서 가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를 위해 준비한 이 복장은 걷기보다는 앉아 있기 적절했다.
검은색 세단, 퇴직 기념으로 나 자신에게 선물한 차였다.
여전히 깨끗했고, 아직 누구도 태워 본 적이 없었다.
멀리서 그가 보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차를 주차하자 그가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나를 가볍게 안았다.
그의 팔 안에서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끌리듯 그와 함께 걸었다.
그는 목적지를 묻지 않았고, 나도 방향을 질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묵묵히 한 공간으로 향했다.
중간에 들른 편의점에서 그는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샀다.
나는 의아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오늘 너, 연예인 같다.” 그가 말했다.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호의와 말투,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웠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차는 무인호텔로 향했다.
이곳이 익숙한 듯, 그는 차분했다.
셔터가 내려가고 우리는 객실로 들어섰다.
방은 넓고 정돈되어 있었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 올라왔다. 편안했고, 동시에 긴장감도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맥주 캔을 열어 건넸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술을 따랐고, 그 순간들 속에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또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는 지금도, 내 안에서 천천히 팽창하고 있었다.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 오후,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완전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차를 몰고 집에 도착했을 땐, 햇살이 거실 창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짧은 낮잠 속, 내 우주는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동생의 전화가 울렸다.
"언니, 자몽차 마실래?
내가 직접 만들었어. 집으로 가져갈게."
몸은 나른했지만, 마음에는 미소가 번졌다.
동생이 만든 자몽차는 향긋한 색과 함께 잠시의 쉼을 선물해주었다.
평온한 오후, 잊고 있었던 여유가 마음속에 잔잔히 퍼졌다.
오후 10시 35분, 남편이 퇴근했다.
그는 조용히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들어왔다.
말없이 내 곁에 누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머릿속에서 복잡한 감정의 수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체온의 온도, 손끝의 떨림, 입맞춤의 깊이 기타등등이다.
지금까지 남편은 나의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새,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남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생각은 다른 이의 온기에 머물렀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잠들기 전, 나는 다시 자문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우주는 여전히 내 안에서 팽창 중이었다
.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제 나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