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rdin BsBsVs Apr 14. 2023

따뜻한 이야기 한 스푼 #3

나는 아픈데 왜 웃는 거야!!

세상에 만고불변의 법칙이 있다.

창피함은 고통을 상쇄시킨다는 것.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그 의지 또한 고통을 상쇄시킨다는 것.)

빙판길 곱게 빗은 가름머리에 단정한 교복을 입은,

 한껏 멋을 낸 새침한 동급생 소녀가 지나간다.

그리고 빙판길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말이 엉덩방아지 그건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쿵 소리와 함께 누어버린

소녀는,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사고장소를 쏜살같이 벗어나 사라진다.

친구들과 나는 사고가 발생된 그 짧은 찰나의 순간

“큰 사고가 아닐까? “라는 걱정의 맘을 잠시 품어

보지만.

깜짝 놀람도, 걱정도,

재빠르게 벗어나는 소녀의 뒷모습을 따라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난, 소녀가 사라진 쪽 방향을 보며

멍하게 친구들에게 말을 했다.

“그래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니까,

   잘 걸어가는 거겠지?”

그리고 친구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부러지지 않았어....””머리도 괜찮은 거고....”

나와 친구들의 이런저런 추측의 말들로

안도의 마음이 찾아오면

세상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코믹 액션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친구들과 박장대소하며

더 크게 웃고 있다. 참 철이 없기도… 그리 없다..

아마 정말 심하게 다쳤다면 웃지 못했겠지..

그걸 보고 웃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렸을 땐

결과(크게 다치지 않음)가 좋으면 웃음으로 승화가

가능한가 보다.

또한 이런 상황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공감하며 안위를 걱정하는  정상인과 타인의 수치와 아픔에 공감하나 못하는 사이코패스 사이를 넘나들게

하는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이 들고 철이 들어 깨달은 사실은 다치든 다치지 않든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게 가장 바람직하다.


난 소녀의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잠시 참으면 아픈 걸로 끝날 수 있어!!”

아픈 건 아프더라도 자존심과 품위까지 잃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아닐까?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또한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리라.


고등학교 친구들과 한창 철 모르고 놀던 때

친구와 함께 교복차림에 한껏 멋을 내고,

오토바이를 빌려 탔었다.

그 오토바이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힘들게 샀기에 애착이 더 깊었으리라.

하지만 의리 있는 그 친구는 선 듯 내게

오토바이를 빌려 주었던 것이다.

친구는 멋쟁이다. 친구의 운동화도 새것이다.

그날은 유난히도 하얀 운동화가 오토바이 은색

머플러(배기구) 위에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난 오토바이 주인인 친구를  뒤에 태운 채,

마치, 먼저 마중이라도 나와서 나를 반겨주는 듯.

도로 양쪽 유난히도  푸르르고 풍성하게 마주 서있는 가로수가 많던 그 시골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오를수록, 머릿결 사이로 싱그러운

 바람 그리고 속도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분위와 기분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허나.. 모든 게 늘 영화와 같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법.

이내 미끄러진 오토바이는 논두렁에 처박히고.

하늘 높이 포탄처럼 날아가는 나와 친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굴렀다.

참, 신기한 건.

친구나, 나나 “혹 누가 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창피함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고,

둘 다 생각할 겨를 없이 본능에 따라.

오토바이는 내 팽개쳐 두고 슈퍼맨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헐래 벌떡 사고 장소에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와 내가 친구 집에 와서 보니

교복 상의 재킷과 바지는 도로바닥에 쓸려 찢겨

있었고 얼굴은 어디서 묻었는지도 모르는

먼지와 검댕이가, 그리고 몸 이곳저곳 쓸린 자리엔 피도 흐르고 있었다.

우선순위가 창피함을 벗어나는 것이라, 통증도 잊고,

정신없이 피 흘리며 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집에 다 왔을 때 사고가 났다는 것과, 오면서 마주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언제나 통증은 정신이 든 이후에 찾아오는 법. 비어있는 친구집에서 정신을 차린 우린,그제서야 거지 같은 행색으로 서로 마주한 채 인상을 쓰고, 신음소리를 내며 통증에 반응을 하고 있다.

그 통증도 잠시, 우린 서로의 우스깡스런 모습을

보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신음을 하는 건지 웃는 건지....

지금 생각해 보니 신음하며 웃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픈데 왜? 웃는 거야!!"

하지만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친구가  아픈데

나 또한  웃고 있는 것이다.


“야! 이 띱때꺄!!!”

친구는 사고 친 내게 악의 하나 담지 않은 작은 원망이 담긴 구수한 욕을 하였고 욕을 해대는 친구가 오히려 정감 있고 밉지가  않더라. 오히려 내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친구 또한 웃음과 신음의 소리가 더 커져갔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창피함이 뭐라고. 슈퍼맨처럼 헐래 벌떡 일어나

사고 현장을 떠나 창피함이 없는 이곳에서

순식간에 멋쟁이에서 거지같이 변해버린 서로를 바라보며 남몰래 신음하며 웃고 있으니…

정말 창피함은 고통을 잠시 잊게 한다는 말인가?

그때 그 오토바이 값은 우리 부모님이 물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친구와 나는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친구에게 미안한 맘

뿐이라.

사실 그때 오토바이는 대림 VF125 모델로 위 오토바이보다 멋졌다.  사진을 찾다보니 저작권없이 쓸수 있는게 이것 뿐이라…

최근에 일이다.

아내가 문밖에 놓인 무거운 택배박스에 걸려 넘어졌다고 한다.

말 그대로 앞으로 붕~ 날랐다나 뭐라나....

개구리처럼 엎어졌지만.

아내가 하는 말이 본사람이 없어 다행이란다.

결과(크게 다치지 않음)가 좋으면 웃음으로 승화가 가능하다고 했던가

나는 오늘도 철없이 사고치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웃고 말았다.

“나는 아픈데 왜? 웃는 거야!!”

그래 내가 웃는 걸 보니 아직 나는 철이 덜 들었나

보다.


허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통증은 미뤄졌을 뿐

지킬걸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찾아오면 그때부터 통증이 커지고 피가 몸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는 것.

그러니, 안 괜찮은 것이다.

그 소녀도 안 괜찮았겠지. 아마도 그때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남몰래 허리를 잡고 아파하지 않았을까?

이제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세상에는 내 자존심과 창피보다도 더 소중한 게 있지 않는가??

지금 지켜야 하는 게 무얼까?

작은 창피함을 위해 고통을 참았다면, 나는 나의 더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겠지?

물론 목적을 이룬 후에 아픔은 피할 수 없겠지만…



이전 02화 따뜻한 이야기 한 스푼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