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지붕 아래서 피어난 꿈

by 소정

새마을 사업의 물결 속에서 우리 집은 주황색 지붕의 현대식 새집이 들어섰다.
햇살이 반짝이던 그 지붕 아래에서 나는 가족의 사랑과 꿈을 키워나갔다. 부엌 앞의 장독대, 마당의 꽃밭, 엄마가 내밀던 따뜻한 달걀 한 알까지— 그 모든 기억은 지금의 나를 길러낸 시간의 품이었다. 그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나의 꿈이 처음 피어난 ‘마음의 고향’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마을마다 지붕개량 운동이 한창이었다. 초가집들이

하나둘 파란이나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갔고,

그 무렵 우리 집은 아예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오래된 전통 초가였던 우리 집은 생명력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주황색 지붕으로

에너지 넘치는 현대식 양옥집이 새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활력 넘치는 주황색 지붕을 처음 올리던 날, 내 유년의 마음은

마치 빛을 삼킨 듯 환한 설렘과 부푼 꿈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유년의 내 모든 추억의 첫 페이지는

새집보다 그 이전, 초가삼간에서 시작된다.

아직 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 한글도 제대로 모르던 나는

밤이면 엄마는 내 어린 손을 꼭 잡고, 엄마의 마음을 대신해서

연필을 꾹꾹 눌러 아빠한테 편지를 대필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딸은 커서 서울로 가서 공부해야 한다”

며 내 꿈을 일러주곤 했다. 엄마의 그 말씀은

마치 나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처럼, 오늘날 내가

단단한 희망을 놓치지 않고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그 옛집에서 키웠던 나의 꿈은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간직한

꿈의 궁전에서 사는 듯 부러움 없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옛집의 부엌에는 두 개의 아궁이가 있었고,

그 정중앙에는 새벽마다 엄마가 길어온

맑은 정안수를 올렸던 조왕 그릇이 정갈하게 올려져 있었다.


뒤뜰로 이어지는 삐걱이는 정지 뒷문을 열면

대숲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사각거림을 들으며

나는 죽순처럼 꿈을 키우던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철부지 아이였다.

적어도 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가을이면 온 동네가 품앗이로 지붕에 이엉을 올렸다.

노르스름한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풍경은,

엄마 품처럼 따뜻했다.

“사람은 혼자 살아도, 집은 혼자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 옛집을 헐고 아빠가 설계한 새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빠는 대도시에서 큰 건물을 설계하던 전문가였다.

그 손길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현대식의 당당한 집이 완성되었다.


벽돌이 한 층씩 쌓일 때마다,

어린 나는 희망의 기둥도 함께 높아지는 것을 보는 듯 뿌듯했다.
방마다 붙박이장이 있어 가구가 필요 없었고,

비밀 금고까지 설계된 집은 그 시절 내게는 작은 성 같았다.


마루 밑에는 지하실을 만들어 곡식을 보관하기도 하고,

여름철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동생들과 나는

그곳을 비밀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그곳에 숨어 작은 창틈 너머로 마당을 내다보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흘러

저녁 준비를 하러 들어오는 엄마와 눈길이 마주치면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내 방은 부엌과 지하실 입구를 사이에 둔 식당 방이었다.
동쪽과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졌고,

나는 달빛 바라기를 하며 잠들곤 했다.


지금도 꿈속에서 그 방에 커튼을 바꿔 달고,

창문을 열어 옆집 은옥이와 눈빛을 주고받던 풍경을 자주 만나기도 한다.
그 방은 ‘내가 처음으로 나를 누렸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어린 나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눈물짓던 그 메마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집에서는 아침이면 닭 울음이 먼저 하루를 깨웠다.
엄마는 닭장에서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을 들고 와서

계란 노른자에 들기름을 한 숟갈 타서 꿀꺽하라고 내밀었지만,

나는 늘 그것을 피해 뒷문으로 달아나곤 했다.


그 철부지 시절의 도망이,

지금은 엄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아릿한 장면이 되었다.


대문 옆에는 엄마가 친정집을 떠올리며 심었다던

단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담장 곁의 양지바른 닭장에는 어미닭이 어린 병아리를 품고

석류나무는 가을이면 붉은 열매를 매달았다.

꽃밭에는 채송화·봉선화·넝쿨장미·포도나무가 철마다 마당을 화사하게 채웠다.

꽃과 나무는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우리 가족의 안녕을 응원하듯 피고 졌다.


새집으로 들어온 첫봄,

장독대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주황색 지붕 마당에

꽃잎이 흔들리던 그때, 나는 확실히 느꼈다.
“세상의 모든 설렘이 이 집 안에 모여 있다고.”


그곳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오래전 흩어진 줄 알았던 오랜 기억들은

여전히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고향처럼,

엄마처럼 나를 부른다. 나를 감싸준다.


돌이켜보면, 주황색 지붕 아래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 가고 싶은지’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긴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새집의 주황빛 역동성 아래 내려앉던

햇살의 떨림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곳에서 시작된 나의 꿈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나는 그 어린 날의 강렬한 색감,

주황빛 지붕의 활기를 품은 채, 오늘도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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