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감나무 위에서

by 소정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나는 엄마의 부재와 처음 마주한 절망을 배웠다.
감나무 위에 올라 떫은 감을 물어뜯으며 온몸으로 울음을 삼켰던 기억—
그 떫은맛과 울음은 나의 분노이자 상처였고,
훗날 ‘엄마 같은 엄마’가 되려 했던 씨앗으로 남았다.


엄마는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바닷가 외갓집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첩첩산골에 시집와 평생을 살아오셨지만,
엄마 기억 속 고향은 늘 푸른 바다와
대문 앞 ‘엄마 이름의 감나무’가 있는 마을 이야기였다.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엄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딴 감나무가 있었다고 했다.
동무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그 나무 위에 올라 숨기도 하고,
하늘 가까이 스치는 바닷바람을 만져보았다는 이야기.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바닷가 외갓집을
마음속에 그리며 자랐다.


하지만 엄마의 소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처녀 공출을 피해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에게 시집온 철부지 소녀.
그녀에게 ‘7대 독자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이름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밥하고 빨래하는 일조차 배워보지 못한 어린 나이에
종가의 끝없는 대소사를 감당해야 했던 시절,
친정을 그리며 울던 젊은 날의 엄마가 늘 애잔했다.


친정에 가고 싶어도 어디로 길을 나서야 할지 알 수 없던 첩첩산골.
엄마 목소리에 스며 있던 친정집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내 마음에도 아리게 스며들었다.


내가 처음 외가에 간 것은 여덟 살 무렵,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병치레가 잦아 입학이 늦었던 나는,
모처럼 간 외가에서 바다 구경을 시켜준다는
외삼촌과 외사촌 오빠를 겁 없이 따라나섰다.


“이것 한 번 타 볼래?”

산골에서 자라 처음 본 드넓은 바다와 나룻배.
호기심과 외삼촌의 권유로 배에 올랐지만,
육지가 멀어질수록 바다의 반짝임과 일렁이는 잔 비늘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 배가 뒤집히면 어쩌지?”


겁에 질린 나는 널빤지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외삼촌과 오빠가 서둘러 배를 돌렸고,
겨우 육지에 닿았을 때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외갓집에 돌아와
무용담처럼 나룻배와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전하지 못했다.


엄마는 이미 고향집으로 떠난 뒤였다.
어른들의 계획된 일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보다 더 큰 충격은, 엄마의 부재였다.


그날의 공포는 오래도록 내 안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지금도 바다와 깊은 물을 보면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마 그때 삼켰던 울음이 아직도 내 안에서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농번기 일을 하느라 며칠 나를 맡겨둔 것이었지만,
처음 엄마와 떨어져 지낸

외갓집의 첫날밤은 너무나 낯설고 무서웠다.

나는 울다 지쳐 잠들었고,

새벽이 밝자마자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아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눈에 들어온 대문 앞의 감나무.
엄마가 자주 이야기하던 바로 그 ‘엄마의 감나무’였다.


나는 나무로 기어올라가
손에 닿는 대로 풋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건 엄마와 나를 분리시킨 어른들에 대한 복수이자,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다.



나를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간 엄마,

나의 슬픔을 모른 척한 어른들,

그리고 엄마의 그리움을 독차지한 감나무.

그 모두를 향한 응징이었다.


아직 단맛이 돌지 않은 떫은 감의 맛은

배신과 분노를 씻어내듯 울음을 대신했다.


아침에 일어난 어른들은 마당 가득 흩어진 감 껍질을 보고서야
내 마음을 알아차렸고,
외삼촌은 나를 달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외가에 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기억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엄마의 부재 앞에서 처음 맞닥뜨린 절망이자,
엄마의 부재를 향한 절규였다.


그 흔적은 내가 얼마나 절실히 엄마를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었고,
훗날 내가 ‘엄마 같은 엄마’가 되려 했던 씨앗이었다.


지금도 가을 햇살 아래 외갓집 감나무 위에서 삼켰던
떫은 울음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떫은 감맛의 옹이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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