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고장 난 볼펜, 말라버린 라미펜 3개,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쓰지 않은 물티슈도 대여섯 개가 항상 올려져 있다.
이전에 작업했던 문서들도 책꽂이에 어지럽게 꽂혀있다.
책상 벽에는 서너 달이 지나 쓸모 없어진 일정표도 붙어 있다.
서랍을 열어보면 더 가관이다. 몇 년 전 처리했던 영수증부터,
쓰지 않고 방치된 클립이며 딱풀, 정리되지 않은 노트들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다.
컴퓨터 저장공간도 예외가 아닌데... 굳이 이런 것까지 저장해 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10년 전 글과 문서, 웹주소, 이미지 파일과 영상 파일. 누군가 참고하라고 보내준 자료들까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파일들이 용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건 병일까 게으른 걸까…
처음 물건을 샀거나 선물 받았을 때, 그것은 나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관심이 덜해진다.
그리고는 방치된다. 신기한 건 관심이 덜해지고 방치된 물건이라도 추억은 유지된다.
그래서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을 추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새 볼펜을 손에 쥐었을 때, 끊어지지 않고 한 획에 멋진 글이 써질 것 같은 그 기분.
새 키보드로 글을 쓸 때 술술 써질 것 같은 기분.
새 의자에 앉으면 뻐근한 허리도 금세 쌩쌩해질 것 같다.
물건들이 자신의 임무를 마친 후에도 나의 그 기분은 이어지는 것 같다.
그게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똥 싸지 않고 먹기만 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버리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미니멀라이프라는 것이 몇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나 같은 인간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쟁여놓는 삶에 염증을 느껴, 버리고 정리하면서 단조로운 삶을 만드는 것. 취지는 좋지만 길거리에서 받은 전단지조차 버리기를 주저하는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미니멀라이프를 먼저 선언한 와이프와 얼굴 붉히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나중에 나이 먹고 악기를 다루면 좋을 것 같아 합의하에 샀던 피아노와 기타, 첼로.
샀던 금액의 반에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중고로 팔려나갔다.
책장에 꽂혀 있던 수백 권의 책들도 Kg당 몇 백 원의 폐지로 팔려 나갔다. 소파와 침대, 옷장 같은 가구들도 정리 대상이 되었다. 자리만 차지하는 큰 소파 대신 혼자 앉아 쉴 수 있는 1인용 의자와 침대대신 토퍼, 옷장을 치우고 몇 벌의 옷만 걸어놓을 수 있는 행거를 놓았다. 그 행거에 들어갈 만한 숫자의 옷만 남기고 옷도 정리했다.
그 외에 내 눈엔 쓸만한 접시와 그릇, 컵들을 모두 버리고 두 명이서 쓸 수 있는 식기세트만 남겼다.
그 당시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당장 쓰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쓰임이 있을 그것들을 왜 정리해야 하는 건지… 더 이해가 안 가는 점은 그렇게 버린 후에 그 역할을 위한 무언가를 또 구매한다는 것이다.
효율적이지 않아 보였다.
지나서 알게 됐지만 미니멀라이프라는 게 돈을 적게 쓰고 구매를 안 하는 생활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에 가치 있게 쓰는 삶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여기서 중요한 건 ‘꼭 필요한’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 있을까… ‘있으면 좋은’것이 아닌 없으면 안 되는 것이 기준이 된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니 2022년을 기준으로 생각해 봐야겠다.
속옷과 계절별 겉옷 한벌. 신발 한 켤레. 이불세트와 작은 부엌. 작은 부엌에 걸맞은 한 세트의 식기와 냄비하나는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이것들은 모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다.
그럼 여기서 하나만 확장해 본다. ‘인간’ 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추가한다.
그 ‘인간’ 답게의 기준은 내 삶과 취향이 기준이 된다. 이때부터는 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시작되는 단계인데, 생각이 많아진다.
나의 경우에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아이패드는 필수다. 글을 쓰거나 영상 편집을 할 때 등, 언제 어디서든 작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음질이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와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있는 에어팟프로가 있어야 한다. 그 외에 스마트폰과 신용카드, 책상과 의자,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까지는 필수 물건들이고 이제는 있으면 좋을 것들을 정리해 본다.
자동차, 카메라, 드론, 목공용품들, 전기자전거, 가방, 시계 같은 것들이 있다.
여기서 조금 사치를 부려본다면 발뮤다 토스트기와 랜턴, 맥북 정도가 추가되겠다.
있으면 좋을 것들은 취미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취미라는 것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면 취미용품 중에서 없으면 안 되는 것과 있으면 좋은 것들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목공용품에도 필수품들이 있는데, 자르고 다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가 있고 여기서 하나씩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어느 수준에서 끊을지는 목공이라는 취미가 나의 삶에 어떤 가치를 주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하면 된다. 나는 디월트 제품을 기준으로 각도절단기와 트리머, 샌딩기 등을 구매했는데, 구매한 장비들을 보니 내 삶에 꽤 큰 비중이 있어 보인다.
**사람을 만날 때도 ‘미니멀관계’가 필요할 수 있겠다.**
특히나 나 같은 ‘INTJ’ 같은 인간들에게는 굳이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을 곁에 두려고 가식적인 웃음을 짓거나 누군가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도 않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생각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깊은 관계는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맺어진 가족들과 오로지 내 의지로만 맺어진 배우자면 충분하다. 여기서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있으면 좋은’ 사람들 몇 명으로 인생이 좀 더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
내 기준에 ‘있으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은 매력이 있다. 내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라던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재미’를 느낀다. 인터뷰를 많이 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과 잘 어울리는 기질인 것 같다. 그들도 나를 만날 때 흥미를 느끼고 ‘있으면 좋은’ 사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몇 년 전에 취미 삼아 목공으로 만든 물건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무려 열개 이상 구매 해주신 분이 계셨다. 주소를 보니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라, 전화를 드리고 직접 배송해 드리면 어떻겠냐고 여쭤보니 흔쾌히 허락하셔서 주말 저녁에 갖다 드렸다.
7, 8층 정도 되는 빌라에 도착하자, 1층으로 마중을 나와주신 그분은 60대 정도 되신 인상 좋은 할아버지셨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이곳엔 남자들만 살아요’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할 땐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었고, 집안에 가득 고여있는 담배연기 때문에 도박장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실내엔 아무도 없었고 혼자 사시는 것 같았다. 두 뼘쯤 되는 싱크대에 하부장만 있는 단출한 부엌. 넓은 거실엔 큰 책상과 소파, 테이블이 있었다. 책상 위엔 최신식 아이맥과 맥북, 아이패드가 놓여 있었는데, 디자인 작업을 하시는 분인가 싶었다.
여자친구가 보내준 사과라는 농담과 함께 과도와 접시를 내어주셨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뭘 믿고 서슬 퍼런 칼을 내어놓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과를 깎자, 본인에 대한 소개를 해주셨는데, 은퇴한 신부님이셨다. 그 빌라 전체가 천주교 소유의 건물로 은퇴한 신부님들이 생활하시는 생활관이었다. 어떤 간판도 표식도 없는 보통의 빌라였는데… 물건을 전해주러 간 자리였지만, 거의 2시간 정도 그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분도 회사를 다니며 목공을 하고 팔기까지 하는 내가 흥미로우셨던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고 나 역시 신부로서의 삶은 어떤지 많이 물었다. 아직 은퇴할 나이까지는 아니지만 허리 수술을 하다 신경을 잘 못 건드려서 통증을 심하게 느끼는 병에 걸리셨다고 했다. 엄청난 양의 마약 성분 진통제를 먹고 부작용으로 몸이 뚱뚱해졌다며 웃으셨다. 신부가 된 사연부터 세상에 미련이 없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이분과는 아주 가끔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이런 인연은,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인생에 작은 이벤트가 된다.
나이가 어릴 때는 이성과의 만남에 설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썸’ 같은 만남은 일어나지도 않지만 설사 일어난다 해도 별로 흥미롭지 않다. 시각적인 끌림은 3분 이상을 가지 못한다. 하지만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흥미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50년 가까이 살면서 박혀있는 고정관념, 세상을 바라보는 좁아진 시각을 깨 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늘 기대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초등학생들과 대화를 하면 죽었던 뇌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똑같은 상황에서 초등학생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준다. 통념상 상대방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도 거침없이 내뱉고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도 상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올 때가 있다.
미니멀라이프가 무조건 물건을 적게 사는 게 아니듯, 미니멀인간관계 역시 무조건 사람을 적게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맞는 물건과 사람이라면 비싼 값을 주더라도 구매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미니멀리스트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