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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리 Sep 04. 2023

혼자서 힘들어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도와드리렴

 "바쁘냐?"

 " 뭐 늘 비슷하죠. 별일 없으시죠?"

 "응 집에도 별일 없어. 너도 집에 한번 와야지. 너 와서 이거 프린터도 고쳐줘야 해. 집 프린터기 잘 안된다고 얘기한 지가 언제인데."

 맞다. 집 프린터가 안 되니 한번 봐달라고 하셨었지.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말씀하신 지 벌써 몇 달이 돼간다. 물론 내가 프린터 전문기사는 아니지만 보통은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일전에는 해당 프린터에 맞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서 설치해야 하는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하도 안 해줘서 아버지께서 프린터를 AS 센터에 맡기셨던 적이 있다. 젊은 내게는 별 문제가 아닌데 아버지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띵동"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성 고객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저 인증서 좀 받으러 왔어요. 제 하나 만들어서 주세요."

 60대 초반의 남성 고객님이셨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인증서라는 실물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인증서는 전자상 존재하는 신분증 같은 것이다. 실물이 존재해, 손으로  주고받고 하는 개념이 아니다.

 "고객님, 인증서는 저희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고객님께서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 직접 받으시는 겁니다. 저희는 고객님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전산 등록을 해놓는 것이고요."

 "아, 그래요? 여기서 받아가는 게 아녜요?"

 "네. 고객님께서 직접 비밀번호도 설정하시고 인증서도 직접  받으시는 거예요."

 "나 이런 거 할 줄 모르는데요?"

 "음, 이거 뭐 때문에 필요하신 거예요?"

 "세금계산서 발행해야 하는데 그게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개인사업자이신 것 같았다.

 "고객님, 그럼 혹시 집에 인증서 대신 받아주실 분이 계신가요? 자녀분이나....."

 "아니요. 제가 하려고요. 애들은 바빠서 못해줘요. 저 잘 못하는데 여기서 해주면 안 되나요?"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전언했듯이 인증서를 받는 것은 고객의 몫이다. 나의 일이 아니다. 반면 대기하고 있는 고객들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내가 내 업무가 아닌 업무를 해주느라 다른 고객의 일을 미룬다면 이는 다른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된다. 다른 직원들의 매서운 눈초리도 걱정이다. 내 업무가 아닌 일을 하는 동안 다른 직원들은 나 대신 일을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인증서를 받고 있다가는 분명 한 소리를 고도 남을 테다. 일전에 비슷한 일로 괜한 오지랖을 부린다고 핀잔을 들은 적이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세금 계산서용 인증서는 폰이 아닌 PC에서 받아야 한다. 내가 고객의 집까지 따라가서 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객님, 일단 세금계산서용 인증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고객님께서 직접 받으셔야 해요. 제가 하는 방법을 종이에 이따가 써드릴게요. 일단 아이디부터 정해주세요."

 "아이디가 뭐야?"

 "포털사이트에서 쓰시는  있잖아요. 그거 쓰셔도 돼요."

 "포털이 뭐야?"

 "아...... 그 이메일! 이메일 쓰시는 거 앞부분이요!"

 "이메일 안 써요 나는."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과연 이분이 집에 가서 혼자 인증서를 받으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고객님, 아니면 주위에 대신 인증서 받아주실 분 안 계실까요? 혼자서는 힘드실 것 같은데."

 "없어요. 나 혼자 해야 해요. 자식들도 제 밥벌이하느라 바빠요."

 나는 고객님 대신 아이디를 만들어드렸다. 별 수 없지 않은가. 고객님 이니셜과 생년월일 등 이것저것 조합해서 어찌어찌 만들었다. 아이디를 만들어 드리, 보안카드 사용법을 알려드리고, 집에 가서 컴퓨터로 어떻게 하는지까지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가며 종이에 써드렸다. 만에 하나 이렇게 했는데도 못 하실까 봐 원격지원받을 수 있는 고객센터 번호까지 알려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생각했다. 고객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업무를  보고 가셨다.


 다음날.

 그날도 고객이 엄청 많았다. 대기 고객이 너무 많아서 화장실도 못 갈 정도였다. 미리 모여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한꺼번에 은행에 오기로 약속이라하셨나 싶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고객님의 일처리를 하고 있는데 동료 직원이 다가왔다.

 "장 대리님. 저 고객님께서 장 대리님한테 일 보셔야 한다는데?"

 "누구요?"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의 눈빛을 따라가 봤다. 익숙한 실루엣. 많은 고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었다.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서 계셨다. 아예 PC를 은행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머리가 띵 했다. 이렇게 고객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객님께 걸어가는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고객님. 끝내 안 되신 거예요? 원격지원 신청은 해보셨어요?"

 "응. 안 돼요. 왠지 모르겠어. 그냥 좀 해줘요. 우리 집에 못 온대서 내가 이렇게 노트북까지 가져왔잖아. 전화도 뭐 어떻게 하라는데 못 알아듣겠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정말 불현듯이 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아버지도 컴퓨터나 스마트폰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요즘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도 어디선가 이렇게 하고 계시겠지.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물어볼 데는 없고. 마음은 급한데 해주는 설명은 못 알아듣겠고. 얼마나 답답하실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코끝이 찡했다.

 "고객님 혹시 뒤에 일정이 있으신가요? 두세 시간 정도 이따가 다시 방문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은 기다리고 계시는 고객님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이 업무를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고객님께서 가져오신 이 노트북으로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이따가 4시쯤 오세요."

 고객님께서는 4시쯤 다시 은행을 방문하셨다. 마침 대기 고객도 많지 않아서 내가 고객님의 업무를 도와드릴 수 있었다. 다음에는 고객님이 혼자 하실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가며 인증서를 받았다. 고객님께서는 정말 고맙다며 연신 인사하셨다. 마음이 뿌듯하고 좋았지만 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그리고 1년 뒤.

 그 고객님께서는 그때 그 노트북을 들고 다시 나를 찾아오셨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돌아다니다가 혼자서 힘들어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우리 할아버지도 어디서 저러시겠지. 저분은 우리 할아버지다.' 하는 마음으로 가서 도와주렴."

 그때가 아마 내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당연한 말씀을 하신다 생각했다. 그냥 도덕책에 있는 그런 당연한 이야기. 머리로 이해하고 "네" 대답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에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나 나는 그제서할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이번주에는 고장 난 프린터를 고치러 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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