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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Dec 09. 2023

원-히트 원더의 대명사 "Daniel Boone"

사람들은 "Beautiful Sunday"가 그의 노래라는 것도 모릅니다

1. "Beautiful Sunday"


누구나 익히 알고 있고 가끔은 혼자서 흥얼거리기도 할 만큼 유명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머뭇거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입가에 그 이름이 맴도는데  딱 집어 말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어 버려 부른 이의 이름이 단 한글자도 생각나지 않는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 1972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경쾌한 리듬의 즐거운 노래, "Beautiful Sunday"가 바로 그런 노래 중 하나이다.


기록에 의하면 "Beautiful Sunday"는  영국에서 인기순위 21위,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5위까지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의 노래 "Beautiful Sunday"를  내가 '전세계를 강타했던(?)'  노래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이 곡이 해외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Beautiful Sunday"는 독일,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 일본(오리콘 챠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도 Top 5에 올랐다. 이 정도면 '전세계를 강타했던(?)'이라는 표현이 아주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한편 "Beautiful Sunday"는 우리나라에서도 대 히트를 했는데, 당시에 노래깨나 한다는 가수들이 앞다투어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이라도 될짝시면 동네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와 온나라 사람들의 아침을 깨우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Beautiful Sunday"는 방송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 산과 들 그리고 바닷가에서도 들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유행했던 '야전'에 힘입은 바 컸다. 아, 야전이란 야외전축의 줄임말인데,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턴테이블과 스피커 일체형의 포터블 오디오 시스템'쯤 될 듯하다.

이 "Beautiful Sunday"를 유달리 좋아했었다.  50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생각나고, 듣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런데 그 이유란 것이 좀 창피하게도 그 곡이 발표된 해를 넘긴 1973년의 어느날 방송에서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 1948~2022)이란 미모의 여가수가 부르는 "Beautiful Sunday"를 보면서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래, "Let me be there",  "Physical"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팝의 여왕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올리비아 뉴튼 존 말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한동안 내 첫사랑 비키(Vicky)의 자리를 그녀가 찬탈해 가버렸다.



2. Daniel Boone(?)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내가 "Beautiful Sunday"를 좋아하게 된 건 전적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가 아니라, 영국 출신의 팝 가수 다니엘 분(Daniel Boone, 1942~)이 1972년 3월에 발표한 "Beautiful Sunday"가 원곡이다.

사진출처: https://bardland.tistory.com/683

다니엘 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수는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듣도 보도 못한 가수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 분은 "Beautiful Sunday", 이 곡 하나를 히트시키고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물론  "Beautiful Sunday"를 발표한 이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세계인의 주목을 다시 끌만한 곡을 발표하지는 못했고,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차츰 잊혀져 갔다.


이런 면에서 다니엘 분은 (주로 대중 음악계에서) 단 한 곡만 히트를 한 가수를 일컫는 말인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물론 이 경우 히트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미국의 대중음악계, 특히 음악산업 종사자들은 빌보드의 핫 100 차트 40위 안에 든 것을 히트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그네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 히트 원더는 빌보드 핫100 차트 40위 안에 딱 한 번만 진입했던 가수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특히 음악산업 종사자들 이야기이고, 우리 또한 그런 기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가수를 생각할 때 대표곡 딱 한 곡 외에는 다른 곡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가수를 원 히트 원더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요컨대 원 히트 원더라는 용어를 쉽게 이해하자는 이야기다. 이제 원 히트 원더의 전형인 다니엘 분을 만나야 할 시간... 다니엘 분이 부르는  "Beautiful Sunday"이다.


3. 또 다른 One-hit wonder들


Pop의 역사가 긴 만큼, 그 오랜 세월 속에는 One-hit wonder에 해당하는 가수들이 많다. 때문에 그들을 일일이 이야기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가수 몇몇을  거론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맺도록 하겠다.


(1) The Knack

1970~80년대의 Pop에 웬만큼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더 낵(The Knack)이란 이름의 그룹이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제1집 앨범에 실려 있던 "My Sharona"라는 제목의 곡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라면 꽤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GET THE KNACK 앨범 재킷.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kdbcall1/222305833120

재킷 사진에서 보듯이 The Knack은 더그 피거(Doug Fieger,  2010년 사망)를 리더로 하는 남성 4인조 그룹이었다.


이들은 1979년  "GET THE KNACK"이란 제목의 제1집 앨범을 발표하며 데뷔하는데, 이들의 데뷔 앨범은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특히 타이틀 곡인 "My Sharona"는 앨범 발매 13일만에 빌보드 차트 1위를 찍었고, 6주간이나 빌보드 차트 정상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빅 히트를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곡이길래 이렇게 단시간만에 정상의 자리에 섰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솟구칠 터인데, 거두절미하고 My Sharona를 들어보자. 내 장담하건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라면, 이미 너무도 많이 들었던 곡일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이들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팝의 전설 비틀즈(Beatles)에 견줄만한 그룹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들의 신화는 여기까지로 끝나버린다. 이어 발표한 2집에서는 "Baby talks dirty"가 히트의 기준인 빌보드 차트 38위에 간신히 턱걸이 하지만(들어보지는 못했다), 이어 발매된 3집의 참담한 실패를 끝으로 1981년 결국 해체의 길을 걷게 되니 말이다. 그러다가 음악계에 부는 복고바람을 등에 업고 1991년에 재결성하여 4집과 5집을 연이어 세상에 내놓기는 했는데, 대중에게 완벽하게 외면당한다.


(2) A-Ha

이웃나라 스웨덴이 ABBA를 통해 Pop의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을 마냥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하던 노르웨이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1985년 노르웨이 출신의 남성 3인조 신디사이저 밴드 아-하(A-Ha)의 첫번째 앨범인 Hunting High & Low가 미국과 영국에서 주목을 받더니, 앨범에 싱글커트된 "Take on Me"가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는 경사가 일어난 것이다. 아, 같은 앨범의 "The Sun Always Shine On T.V." 또한 빌보드 차트 1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러한 성공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물론 빠른 비트와 경괘한 멜로디가 함께 한 세련된 음악 덕분이지만, 멤버들의 수려한 외모 또한 성공을 가능케 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이들의 외모가 여심을 저격한 것이다. 때로는 반항아적  모습으로, 또 때로는 이지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에 여자들이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감미로운 목소리의 보컬리스트 모튼 해킷(Morten Harket)과 터프한 이미지의 맥스 푸루홀멘(Mags Furholmen, keyboard), 그리고 막내인 폴 왁타(Paul Waaktaar-Savoy, guitar)까지... 내가 봐도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외모는 최상급이다.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egizzy/222191801650

아-하의 앨범이 성공한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앨범보다 먼저 세상에 공개된 뮤직 비디오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의 뮤직 비디오는 사람과 만화가 혼재하는 애니메이션 형태로 당시로서는 다분히 파격적이었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었던 그들의 대표곡 "Take on me"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한다.

아-하는 이후 5집 앨범을 끝으로 1994년 해체될 때까지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내놓는 앨범마다 적어도 노르웨이에서는 1위에 올랐으며, 유럽 전역에서도 비교적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바다 건너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은 (내가 아는 한) 없고, 전세계적으로 인기몰이를 한 곡은 더더욱 없다. 한마디로 같은 시대에 활동한 영국 출신의 듀란 듀란(Duran Duran)에 밀리는 양상을 보이며, 조금씩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져 가게 된다.


그러나 아-하는 1998년 노벨 평화상 축하 공연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재결성되어 2000년부터 다시 4개의 앨범을 내면서 성공적인 가수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에 발매된 그들의 6집 앨범(Minor Earth Major Sky)과 7집 앨범(Analogue)은 적어도  노르웨이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2009년에 발매된 9집 앨범(Foot of the Mountain)은 영국에서도 많은 판매량을 보이면서 아-하를 UK Top 5밴드에 들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Certified Award에서는 Platinum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2010년에 다시 해체되었다가, 2015년 또 한번 재결성된 이후 지금까지도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  이글을 쓰면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하가 60줄에 들어선 지금도 활발히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고 있으며, 2021년에는 내한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아-하의 내한공연은 코로나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고 하는 후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하를 One-hit wonder로 소개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One-hit wonder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주관적인 면이 있는데다가, 객관적으로 보아도 "Take on me"처럼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를 정도로 강렬했던 곡은 그 이후엔 없었다. 때문에  아-하도 One-hit wonder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3) Arabesque

독일출신의 여성 3인조 댄스팀  아라베스크(Arabesque) 또한 One-hit wonder로 분류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9장의 앨범을 냈는데, 그 가운데 히트곡은 1977년에 발표한 "Hello Mr. Monkey"가 유일하니까 말이다. 아, 아라베스크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미녀'인데, 합당한 수식어인지 여부는 스스로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사진출처: http://onsol95.com/Music/333

Hello Mr. Monkey가 히트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주로 일본 그리고 당시에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던 우리나라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빌보드 차트 순위에는 한번도 진입하지 못했고,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Certified Award에서 Platinum을 기록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면, 특히 미국 음악업계의 기준에 따르면 아라베스크의 노래 중에는 아예 히트한 곡이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용감하게 아라베스크를 One-hit wonder로 거론하는 이유는 이들이 일본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1981년 서울 국제가요제 주최측이 이들을 (경연팀이 아니라) 초청하여 공연을 하도록 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아라베스크가 부르는 Hello Mr. Monkey를 서울 국제가요제 공연 실황으로 들어 보도록 하겠다.

잘 알고 있다시피 Hello Mr. Monkey는 2001년에 국내 가수 왁스가 개사해서 "머니"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도 소개해 둔다. 원곡이 디스코 기반의 음악이라 백댄서들이 출연하는데 의상이며 춤이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4) Nolans

아라베스크를 이야기하다 보니 One-hit wonder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몇몇 여성그룹이 생각났다. 다만 여기서는 1981년 동경가요제에서 "Sexy Music"으로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4인조 자매 그룹 놀란스(Nolans)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놀란스가 부르는 "Sexy Music"이다.

원래 놀란스는 큰 언니를 포함한 5인조 그룹이었는데, 큰 언니가 결혼으로 탈퇴하기전인 1979년에 발표했던 "I'm in the Mood for Dancing"도 어느 정도 익숙한 곡이었으니, 함께  들어보도록 하겠다.


4. 우리나라에서의 One-hit wonder


One-hit wonder 이야기가 나왔으니, 시선을 우리나라로 돌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있어 One-hit wonder로 꼽을 수 있는 가수(노래)를 찾아 보도록 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초기의 대학가요제 출신들을 꼽기도 하는데, 그들은 대학가요제 출전에 대학시절의 좋은 추억거리를 만드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했을 뿐, 근본적으로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었다(물론 대학가요제를 발판으로 삼아 가수로서의 삶을 이어간 이들도 있다). 그러니 One-hit wonder를 이야기 하는 경우 그들은 논외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있어 One-hit wonder의 영예(?)를 차지할 만한 가수는 누가 있을까?


물론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는 One-hit wonder의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의 두사람(그룹)이 One-hit wonder에 해당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같다.


(1) 임종환

의문의 여지없는 One-hit wonder로 누구보다도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임종환이다. 아래 앨범 사진에서 보듯이 당시(1994년)에 김건모, 룰라, 일과 이분의 일 등에 의해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레개(Reggae) 리듬으로 무장한 임종환(1964~2010)의 제2집 타이틀 곡, "그냥 걸었어"는 정말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사진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609568&cid=60487&categoryId=60497

그런데 당시의 이런 대단한 인기몰이는 단지 노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같다. "그냥 걸었어"가 마치 경주용 자동차라도 된듯이 인기가도를 질주했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곡의 전개가 갖는 특이성 때문이었다. "그냥 걸었어"의 인기 비결은 전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마력을 지닌 여성의 목소리(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임종환의 아내였다)로 노래가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전화속 여성과 마치 대화하듯이 노래가 전개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냥 걸었어"를 들으면 저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One-hit wonder를 이야기하며 왜 난 제일 먼저 임종환을 떠올렸을까? 그도, 그의 노래도 잊은지 오래였는데 말이다. 글쎄, 그것은 아마 그가 2010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자리를 빌어 글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2) Y2K

Y2K는 한국인 고재근과 일본인 형제인 마쓰오 유이치(松尾雄一) · 마쓰오 코지(松尾光次)가 결성한 3인조 한일 연합 밴드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엄존하던 당시로서는 다분히 파격적인 멤버 구성으로 밴드 결성 자체만으로도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멤버 셋의 외모 또한 뛰어나 인기몰이를 할 기반은 충분했던 밴드였다.

사진출처: https://namu.wiki/w/Y2K(%EB%B0%B4%EB%93%9C)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1집 앨범(1999년)은 타이틀 곡인 "헤어진 후에"의 인기에 힘입어 대성공을 거두는데, 아래는 앨범 재킷 사진이다.

사진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86964&cid=60487&categoryId=60501

같은 앨범에 수록된 발라드 풍의 노래 "깊은 슬픔" 또한 어느 정도는 유명세를 탔고, 연이어 발표한 "bad" 또한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헤어진 후에"가 워낙 강렬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중들은 이들의 노래에 더 이상 환호하지 았았고, Y2K는 결국 2002년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내 대표적 애창곡 중의 하나인 "헤어진 후에"를 들어보도록 한다.


(3) 기 타

이런 글을 쓰다보니 One-hit wonder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수들이 연이어 머리에 떠오른다. One-hit wonder로 거론되는 것이 어찌 보면 가수 개인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곡은 대히트 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니 마냥 불명예스럽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어 우리나라의 One-hit wonder들을 몇명 더 열거해 본다.


● 김태정, "백지로 보낸 편지(1981년)"

미모와 가창력을 함께 소유한 대형 여가수라고 생각했는데, 꽤 많은 앨범을 냈지만 이 곡 하나 외에는 히트라는 말을 쓸만한 곡이 없다. 2016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 소식이 들려와 안타까움이 더 했다는...


● 이원진,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feat. 류금덕, 1994년)"

딸아이가 태어나던 해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원진의 아름다우면서도 시원한 창법이 돋보였던 노래이다. 아직 피처링이란 말이 사용되던 때가 아니어서,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을 위해" 앞부분에 나오는 여자가수로만 알려졌던 류금덕의 매력적 보이스가 새삼 그리워진다. 이원진 또한 새로운 앨범을 준비중이던 1997년,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


● 김부용, "풍요속의 빈곤"(1995년)

스무살 청년 김부용이 부르던 노래도 노래지만, 공연때마다 언제나 무대위를 가득 메우는 댄서들 그리고 여성 댄서(?)와의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던 곡이었다. 일본의 보이밴드였던 체커스의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는 논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부용은 이 한곡을 끝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김부용 또한 One-hit wonder의 예로 꼽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의 애창곡이기도 했던  "풍요속의 빈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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