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달음의 샘물 Jul 04. 2024

내 어머니의 고향 공주를 이제서야 찾습니다.

Chapter 12. "충청감영복원지(忠淸監營復原地)"를 찾아서

# 첫째 마당: 개 관



사람들은 공주라는 도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백제 후기의 도읍지였을 뿐, 그 이후에는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져 본 적이 없는 변방의 작은 시골마을... 이 정도가 공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아닐까? 그런데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주는 결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지방행정의 중심이었던 12목(牧) 중 하나인 공주목(公州牧)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충주 청주 홍주(지금의 홍성)와 함께 충청도 4대 고을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1603년(선조 26년)에는 공주에 충청감영(忠淸監營)이 설치될 정도로 차령산맥 이남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아, 감영(監營)이란 조선시대에 각 도의 관찰사(임기 2년)가 집무를 행하던 관청을 말하는데, 요즘식으로  이야기하면 각도의 도청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 공주에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공주가 충청지방의 1번 도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충청감영은 설치된 이후 몇 번에 걸쳐 그 자리를 옮겼고, 1707년(숙종 33년)에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한 이후에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1932년에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충청감영에 속해있던 주요 건물들은 거의 모두 훼철된 채 방치되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충청감영 복원사업이 행해졌다. 오늘은 그렇게 복원이 행해진  "충청감영복원지(忠淸監營復原地)"를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충청감영복원지는 그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충청감영복원지는 네비에도 안뜨기 대문이다. 그러하니 네비에 '공주한옥마을'을 치고 찾아가거나, 감영의 배치에 있어 중심축이 되는 '선화당(공주)'을 치고 찾아가야 충청감영복원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둘째 마당: 충청감영복원지



나는 공주한옥마을 구경도 해볼 겸 해서 공주한옥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옥마을을 관통해서 충청감영복원지로 향했는데, 이제부터 이렇게 둘러본 충청감영복원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아,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 충청감영은 건물만도 49동 491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의 충청감영복원지에는 달랑 3개의 건물(누각)만 남아있다.


1. 포정사문루(布政司 門樓)


저 멀리 보이는 계단 위로 우뚝 솟은 누각이 충청감영의 정문누각의 역할을 했던 포정사 문루(布政司 門樓)이다. 아, 포정사란 조선 시대에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를 부르는 이름을 말한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포정사 문루인데, 원래는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옆에 있던 것을 옛 공주군청으로 옮겼다가 1993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정면에 충청도 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고 쓰인 편액이 보인다.


포정사문루는 사진에서 보듯이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우진각지붕을 이고 있다.  1층의 양옆은 판자벽으로 완전히 막아 놓고 가운데 3칸만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는데, 2층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리고 오르내리는 계단은 서쪽에 만들어 놓았다. 포정사 문루는 공주 제2 감리교회, 사무실, 심지어 일본 사찰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내부는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상당 부분 개조되어 원모습을 상실했다. 그러나 겉모습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는 포정사문루에 대한 그 밖의 이야기는 아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포정사 문루에 올라 공주한옥마을을 바라보며 사진을 한 장 남기고,

포정사문루 앞에서 바라본 공주한옥마을

열려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선화당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2018년에 원래 포정사 문루가 있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앞에 포정사 문루를 재현해 놓아서, 공주에서는 2개 버전의 포정사 문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주를 워낙 여러 번 찾았기 때문에, 이렇게 재현된 포정사 문루도 내 사진기안에 담겨있다. 문루 왼쪽 아래에 충청감영 포정사 문루에 대한 안내판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충청감영 복원지에 있는 포정사 문루의 문안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포정사 문루이다.


2. 선화당(宣化堂)과 동헌(東軒)


포정사문루를 뒤로 하고 앞을 바라보면 두 개의 건물이 보이는데, 정면에 보이는 것이 조선시대에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宣化堂)이고, 선화당 좌측으로 보이는 것이 공주 목사가 업무를 보던 동헌(東軒)이다.

포정사문루, 선화당, 동헌을 한컷에 잡으면 이렇게 되는데, 아래 사진을 보니 포정사문루는 우진각지붕을 이고 있고, 선화당과 동헌은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1) 선화당

지금 우리가 보는 선화당은 1833년(순조 33년)에 건축된 건물인데, 선화당 또한 원래 공주사대부속 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다. 그러다 1937년에 국립공주박물관(당시 공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관으로 이용하다가 199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해 놓았는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화당은 관찰사의 업무공간이었던 만큼 그 규모가 상당해서 정면 8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얹고 있어.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원래의 선화당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더 큰 건물이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씩 축소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는 안 보이는데, 선화당 내부는 칸을 막지 않고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있으며, 기둥이 2열로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 열어 놓지를 않아서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선화당(宣化堂)의 현판인데,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선화당이라... 그 의미를 생각하면, 관찰사의 업무공간을 부르는 이름으로는 제격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선 팔도의 감영에서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건물의 이름은 하나같이 모두 선화당이다.

선화당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2) 동 헌

아래 사진 속의 건물은 '동헌(東軒)'이다. 동헌은 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인데, 감영 소재지의 목(牧)의 경우는 관찰사가 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공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 목사가 업무를 보던 건물을  동헌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 건물이 목사의 생활공간인 내아(內衙, 西軒이라고도 함)의 동쪽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동헌은 지금의 선화당과 마찬가지로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인데, 조선 후기인 1896년(고종 33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1911년까지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는데, 1911년부터 1971년까지는 공주의료원 부속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공주동헌은 복원 - 해체보관을 거쳐 1994년 현재의 위치에 원래의 모습대로 이전 복원하였고, 현재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헌에 관한 설명은 이하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3.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忠淸監營 測雨器)


충청감영복원지에서 만나는 안내판인데, 오른쪽의 안내도를 보면 3동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이 3동의 건물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포정사 문루, 선화당, 동헌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선화당과 동헌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  4란 숫자도 보이고.

그 무엇인가는 바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忠淸監營 測雨器)인데, 그에 대하여 아래 사진을 참조하여 설명을 덧붙여보면 이렇게 된다. 잘 알다시피 측우기는 세종대에 만들어진 이래 여러 차례 만들어져 전국의 감영에 보내 빗물의 양을 측정하도록 하였던 것인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시대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또한 충청감영 측우기는 19세기(1837년, 헌종 3년)에 제작되었지만 세종 대 이후 강우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이런 점이 인정되어 현재 국보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국보급 문화재를 일본이 자신들의 나라 기상청으로 가져갔었는데, 다행스럽게도 1971년에 반환되었다.


충청감영측우기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높이 31.5㎝,

지름 14.5㎝,

무게  6.2㎏

이런 의미를 가진 국보를 이렇게 방치(?)시켜 놓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충청감영 측우기의 진품은 현재 국립기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우리가 충청감영복원지에서 보는 아래 사진 속의 측우기는 2006년에 제작된 모형이다.

아, 측우기 밑에 놓여 있던 측우대는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위 사진 속의 받침대 저건 뭐냐고? 그 답은 아래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충청감영복원지 안에 있는 건물이며 측우기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막상 충청감영복원지 자체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충청감영복원지 뒤에 있는 관광단지길에서 바라본 충청감영복원지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전 29화 내 어머니의 고향 공주를 이제서야 찾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