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6 - 크라나하(Cranach)를 만날 수 있는 두 곳.
1. 크라나하, 그는 누구인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렸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47년을 살아갔던 화가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루터와 그의 부인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22)는 물론이고, 루터 부모님의 초상화까지 그려냈던 그 화가가 바로 크라나하(Lucas Cranach, 1472~1553)이다. 아, 크라나하집안은 아들과 손자까지 모두 화가로 활동했는데, 이 중 아들의 이름 또한 Lucas Cranach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을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하 (Lucas Cranach der Ältere)와 아들 루카스 크라나하(Lucas Cranach der Jüngere, 1515~1586)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다만 이글에서 크라나하라고 하면, 그건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하를 말하는 것이다.
1502년부터 빈(Wien)에서 화가의 삶을 이어가던 크라나하가 비텐베르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Kurfürst)인 프리드리히(Friedrich)가 1504년에 그를 궁정화가로 비텐베르크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크라나하는 궁정화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실로 다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즉, 약사로서 약국을 경영하기도 하고, 인쇄업자로서 사업적 수완을 뽐내기도 한다. 요즘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크라나하는 예술가적 기질과 경영 마인드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를 잘 결합시킨 독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1519년부터 1549년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비텐베르크 시의원으로 10년간 재임하고, 또한 3년간(17년 간이란 기록도 있어) 시장으로 재임하는 등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제단화(祭壇畵) 등의 작품을 통해 종교개혁이 주창하는 바를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종교개혁에 적잖이 기여한 면도 있는데,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카스만(Margot Kaßmann)은 이런 점을 강조하여 "루터가 종교개혁을 글로 표현했다면 크라나하는 신앙을 그림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서 확산시켰으며, 루터를 종교개혁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한 사람이 바로 크라나하였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편 동시대를 살아갔던 루터와 크라나하는 서로 친분 또한 두터웠다. 루터는 1520년에 크라나흐의 딸 안나가 침례 받을 때 대부(代父)였고, 크라나하는 1525년에 루터의 결혼식에 증인(Trauezeuge)이 될 정도로 말이다.
아, 이렇게 비텐베르크에서 성공적(?) 삶을 이어가던 크라나하였지만, 죽음을 이곳에서 맞이하지는 않았다.. 비텐베르크가 1547년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에서 카를 5세가 이끄는 황제군에 패하면서 크라나하도 자연스레 궁정화가의 직을 잃게 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인데, 슈말칼텐 전쟁에 관하여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크라나하는 궁정화가의 직을 잃은 후에도 바로 비텐베르크를 떠나지 않고 5년을 비텐베르크에서 더 머물렀다. 그러다 말년인 1552년에 딸이 살고 있던 바이마르(Weimar)로 이사를 갔고, 이듬해인 1553년 10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의 야곱공동묘지(Jakobsfriedhof)에 안장되었고.
아, 크라나하가 말년을 보낸 집은 지금도 바이마르의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에 잘 보존되어 있는데, 분홍색(?) 창살이 선명한 집이 바로 크라나하가 말년을 보내다 사망한 집이다.
크라나하가 사망한 집의 정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이 집에서 루카스 크라나하(Lucas Kranach)가 1552년부터 1553년 10월 16일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살았다"라고 쓰여 있다.
죽은 날은 분명하지만, 이사 온 날은 언제인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
2. 비텐베르크에서 만나는 크라나하
크라나하는 1504년에 비텐베르크에 온 이후 도시 중심인 시청사 바로 맞은편에 주택을 구입하였고,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축적한 부를 토대로 그 인근의 주택과 대지를 계속해서 구입해 나간다. 그 결과 152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크라나하가 가지고 있던 토지와 건물은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삶을 살아간 크라나하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지금부터는 비텐베르크에 남아있는 그 많은 크라나하의 흔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두 곳을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아, 크라나하의 제단화나 루터의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는 곳 또한 의미가 있지만, 그런 곳들에 관해서는 이미 따로 소개한 바 있으니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1) 크라나하 호프(Cranach-Hof)
비텐베르크에서 크라나하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는 제일 먼저 시청 광장에서 성 쪽으로 이어지는 거리인 슐로스슈트라세[Schlossstrasse: Schloss(성)+Strasse(거리)] 1번지에 있는 "크라나하 호프(Cranach-Hof)"를 들 수 있다. 밝은 베이지색(?) 건물인 크라나하 호프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 이곳엔 크라나하 약국(Cranach Apotheke)과 '크라나하 헤어베르게(Cranach Herberge)가 들어서 있다.
크라나하가 비텐베르크에서 부를 축적한 것에는 그가 경영했던 약국이 기여한 바가 상당히 크다. 이는 당시 그의 약국은 비텐베르크 최초의 약국으로 독점적 이익을 누린데 힘입은 것인데, 그가 경영했던 약국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크라나흐 약국'이라는 이름으로 성업 중이다. 약국(Apotheke)을 의미하는 A자가 선명한 크라나하 약국의 돌출간판이 보이는데,
유리창에도 "루카스 크라나하 약국(LUKAS KRANACH APOTHEHE)"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았다.
크라나하 약국의 입구.
입구 위쪽 벽에
"루카스 크라나하, 비텐베르크의 화가.
1472년에 크로나하(Kronach)에서 출생하여 1504년에 비텐베르크에 와서 1520년에 이 약국을 샀다. 1527년부터 1544년까지 비텐베르크 시장을 역임했고, 1553년 10월 16일에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라고 쓰여 있어.
크라나흐가 실제로 살았고 루터도 종종 방문했던 이 건물의 오른쪽은 개조를 해서 현재 "크라나하 헤어베르게(Cranach Herberge)"로 사용되고 있다.
아, 독일어의 헤어베르게(Herberge)는 보통 호스텔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여행 중에 머무르는 유스호스텔을 독일어로는 유겐트헤어베르게(Jugendherberge)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크라나하 헤어베르게를 단순히 호스텔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크라나하 헤어베르게는 호텔, 스위트룸, 페리엔보눙(Ferienwohnung)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크라나하 호프는 투숙객들의 다양한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각종 시설과 서비스(화실, 작업장 및 학습공간,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솔루션을 갖추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크라나하 헤어베르게는 '숙박시설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크라나하 헤어베르게의 팜플렛 또한 이런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건물 한가운데 아치형으로 뚫린 통로가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뜰이 나온다. 그리고 그 초입에 이런 입간판이 서 있는데, 숙박이나 식사 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왼쪽으로 가라는 이야기.
위 사진 속의 입간판을 지나치면 뜰 안쪽 오른편에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크라나하가 당시에 경영했던 인쇄소를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방문자들이 실제로 중세 시대의 인쇄술을 경험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사진 한 장을 찍어놓고 돌아서서 아쉽게도 내부는 보여주지를 못한다.
입구 반대편에서 바라본 뜰의 모습이다. 반대쪽에서 바라보았으니, 모든 반향이 반대가 된다. 즉, 왼쪽의 건물이 인쇄소를 재현해 놓은 곳이고, 오른쪽의 건물이 숙박과 식사가 가능한 크라나하 헤어베르게가 된다. 사진 뒤쪽 한가운데에 이 뜰안으로 들어서는 아치형의 입구가 보인다.
(2) 크라나하의 집(Kranach-Haus)
비텐베르크에서 크라나하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한 곳은 시청사 바로 맞은편 마르크트 4번지(Markt 4)에 있는 오렌지색 5층 건물인 "크라나하 하우스(Kranach-Haus)"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건물 앞의 안내판은 이곳 또한 크라나하-호프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혼돈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 여기서는 이곳을 크라나하-하우스로 부르도록 하겠다.
그러고 보니 건물 입구의 바닥에도 크라나하-하우스라고 써놓았다.
현재 크라나하 하우스에서는 "크라나하의 세계 (Cranachs Welt)"라는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관람을 망설이게 할 정도로 입장료가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략 10유로.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크라나하의 세계'를 꼼꼼히 보고 싶다면, 아래 사진과 같은 팸플릿을 집어들 필요가 있다.
5층 건물인 크라나하의 집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되는 곳은 1층과 2층 그리고 안뜰인데, 1층과 2층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다. 다만 1층은 매표소와 기념품 샵이 사실상 전부이고, 전시는 주로 2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층에서 조금 주의 깊게 볼 것으로는 크라나하의 문장(紋章)이 있는데, 보다시피 문장의 모습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장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용(龍)'이다.
위의 안내도에서 보듯이 2층에는 특별전시실을 포함해서 많은 전시실이 일자 형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2층 전체의 모습은 대략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어떤 전시물이 어떤 전시실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하의 이야기는 많은 전시물 중 내 관심을 끌었던 몇몇 전시물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수준의 것임을 밝혀 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크라나하와 루터는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 두터운 친분을 바탕으로 하여 크라나하는 루터와 그의 부인, 그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뿐만 아니라 멜란히톤(Melanchton, 1497~1560)과 같은 친구 내지 동료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크라나하가 그린 루터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으로는 루터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뒤에, 수염을 잔뜩 기른 채 융커 외르크(Junker Jörg)라는 가명으로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숨어 지내던 때의 모습을 담은 것을 들 수 있다. 크라나하의 집에는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루터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까지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쪽의 사진이 루터의 모습을 담은 그림에 관한 설명이고, 오른쪽이 루터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이다.
사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전시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전시실 중의 하나인데, 루터와 관련된 책들이 있었던 곳이 아닐까 싶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크라나하는 인쇄소(Druckwerkstatt)도 경영하였는데, 이렇게 인쇄기를 비롯한 인쇄와 관련된 각종 도구 등을 전시해 놓은 전시실도 있다.
한편 크라나하의 인쇄소는 종교개혁과 관련하여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이념을 담은 루터의 책, 그리고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책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534년에 이곳에서 출간된 루터 성경에는 크라나하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목판화 117개 작품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요즘식으로 이야기하면 종교개혁의 이념을 품은 신학자와, 어렵기만 한 종교개혁의 이념을 그림을 통해 쉽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화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이곳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칫 놓치기 쉬운 천장의 모습을 쉽게 바라볼 수 있게 해 놓은 거울.
크라나하의 집 2층에서 바라보면 마르크트플라츠와 그 안에 있는 비텐베르크 시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시청사 앞의 동상은 루터의 동상인데, 이 사진을 보면 크라나하의 집이 시청사와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라나하의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은 이곳인데, 바로 크라나하의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전시실이다.
이것은 반대편에서 찍은 (같은) 전시실의 모습이고. 이미 교회 등에서 그의 작품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눈에 익숙한 작품들이 많아서 더욱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
크라나하. 오늘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참으로 다양한 삶을 살아냈다. 그러나 크라나하를 이야기할 때면 그 시작은 언제나 화가로서의 크라나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화가로서의 크라나하는 화단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래 사진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말하는 5대양 6대주에 크라나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 이렇게나 많다.
크라나하-하우스의 안마당인데, 오른쪽의 건물이 지금 내가 둘러보고 나온 크라나하-하우스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들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것이 알고 싶다면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